국방일보 - [국방저널 스페셜-한국의 서원] 장성 필암서원

관리자 2022.04.29 14:44 조회 290

수령 200년 은행나무 지나 확연루 앞에 서니…

선비의 ‘확연대공(마음이 맑고 확연히 크게 공평무사하다)’ 절개 그려지는 듯


호남 유일 문묘 배향된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 모시는 곳
교육공간 앞에, 제향공간 뒤에…전형적인 ‘전학후묘’ 배치
유생들 공부하는 ‘청절당’ 남쪽 아닌 북쪽 향한 점이 특징
인종이 세자 시절 하사한 ‘묵죽 판각’ 복사본 보관돼 있어
호남 유일의 사액서원인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 서원의 형태와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어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됐다. 사진은 필암서원 전경.
호남 유일의 사액서원인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 서원의 형태와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어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됐다. 사진은 필암서원 전경.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6호인 ‘하서 유묵 목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6호인 ‘하서 유묵 목판’.

김인후 선생 동상.
김인후 선생 동상.

확연루는 서원의 정문인 문루 겸 휴식공간인 누각으로 편액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확연루는 서원의 정문인 문루 겸 휴식공간인 누각으로 편액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확연루를 통해 들어가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청절당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동재와 서재, 경장각, 장판각, 우동사 등 주요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확연루를 통해 들어가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청절당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동재와 서재, 경장각, 장판각, 우동사 등 주요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장판각에 보관하고 있는 목판.
장판각에 보관하고 있는 목판.

그리 높지 않은 문장산이 뒤를 감싸고 앞에는 문필천이 흐르고 있는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교육과 학문 수련공간을 앞쪽에, 선현에 대한 제사 지내는 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를 보여 주는 호남의 대표적 서원이다.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18선정(先正) 가운데 한 분인 문정공 하서 김인후(金麟厚) 선생을 모시고 있다. ‘필암’은 김인후 선생의 고향인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입구에 자리한 붓바위(筆巖)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글=박영민/사진=주상현 기자

촬영을 위해 지난 3월 하순에 찾은 필암서원은 전날 열린 ‘2022년 하서 선생 추모 경서 강독회, 춘향제’의 여파가 남은 탓인지 청절당을 비롯해 사원 곳곳에 행사에 사용됐던 흔적들이 남아 있어 조금은 부산한 느낌을 줬다.

필암서원은 김인후 선생이 돌아가신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호남의 유학자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으며, 1662년 현종으로부터 ‘필암’이라는 사액을 받고 서원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당시 서원이 있던 곳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고 해 현종 13년(1672)에 지금의 위치인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로 옮겨 짓게 됐다. 1786년 양산보의 아들이자 김인후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추가로 배향했다.

넓게 조성된 서원 앞 정원을 지나면 서원 출입구 앞에 선 하마비와 홍살문, 그리고 2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홍살문 옆 하마비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걸어서 서원에 들어감을 알려 준다. 홍살문을 뒤로하고 걸으면 서원의 문루 누각인 ‘확연루(廓然樓)’를 볼 수 있다. 확연루의 확연(廓然)은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평무사하다’라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을 집자한 말이다.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2층 문루다. 널문을 닫아 놓으면 안팎이 차단되지만 열면 시원스레 안팎이 연결되는 구조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루 앞마당에는 몇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그중 한 나무에선 어느새 봄이 온 것을 알려 주듯 꽃송이가 달려 있었다.

마당의 왼쪽 작은 문을 지나면 곧바로 유생들의 강학공간인 청절당(淸節堂)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인데 들어 여는 문이 달려 있고, 양옆 한 칸씩은 온돌방으로 돼 있다. 이곳은 원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 선비들의 모임과 제사 때에는 유림의 회의 장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옛 진원현 객사 건물이었던 것을 1672년에 옮겨 왔다. ‘청절당’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글씨다. ‘청절당’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쓴 하서 선생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 청절당 처마 밑의 사액 현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병계 윤봉구 선생의 글씨다. 한편 송시열과 송준길은 대전을 대표하는 유림이자 은진 송씨 집안의 형제지간인데 확연루 현판은 송시열이, 청절당 편액은 송준길이 썼다니 필암서원과의 인연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청절당 내에는 백록동 학규와 정조대왕의 어제(御製) 사제문(賜祭文), 전교(傳敎) 등의 편액과 송강 정철의 시판이 걸려 있다.

청절당에서 마주 보이는 정면에는 제향공간인 ‘우동사(祐東詞)’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있고 양옆으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동재(오른쪽) 진덕재(進德齋)와 서재(왼쪽)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진덕재는 선배들이 기거하고, 숭의재는 후배들이 기거했다.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글씨다.

필암서원은 여느 서원처럼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제향공간이 뒤에 놓이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인다. 다만 강학당인 청절당의 전면이 확연루를 바라보는 남쪽이 아니라 등지고 북쪽을 향하고 있는 점과 원생들이 거주하는 재실이 청절당 안마당에 자리한 모습이 다른 서원과 다른 특징이다.

이는 필암서원이 자리한 곳이 평지다 보니 보통 서원 건물 배치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당도 다른 건물과 같은 평지에 자리하게 됐다. 그래서 이념적으로나마 김인후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 위치한 자리를 높이기 위해 청절당이 사당을 우러러보는 느낌이 들도록 배치하게 된 것이다.

청절당 앞에는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 가득한 3칸의 경장각이 위치하는데, 정조대왕이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면서 내려보낸 내탕금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 그려 하서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墨竹)’ 그림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 묵죽도는 훗날 하서 선생의 높은 절의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됐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어필로 벌레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이 처져 있다. 경장각 안의 묵죽 판각은 복사본이고 진품은 광주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제향공간인 우동사가 있다. 이곳 북쪽에는 하서 김인후 선생의 신위가 봉안돼 있으며, 동쪽 벽에는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이 종향돼 있다. 이곳에서는 음력 2월과 8월 두 번에 걸쳐 유림과 지방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우동사 서쪽 담 밖에는 제사 지낼 때 쓸 제기와 재물을 보관하는 전사청이 있고, 동쪽 담 밖에는 『하서집』의 목판이 소장된 장판각과 서원에서 일하는 노비 가운데 최고책임자가 생활했던 한장사가 있다.

장판각은 유생들의 학습용 책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관하던 곳으로 『하서전집』 649판, 『초서천자문』 18판, 『해자무이구곡』 18판, 『백련초해』 등 목판 700여 매가 보관돼 있다.

우동사 앞에는 춘추 향사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는 비석인 ‘계생비’가 있다. 비석 앞면의 ‘필암서원계생비’는 송재 송일중 선생이 썼다. 이 비는 ‘묘정비’도 겸하고 있는데 뒷면에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등이 기록돼 있다. 비문은 송병선 선생이 짓고 글씨는 윤용구 선생이 썼다. 서원 입구의 확연루 서쪽 담 너머에는 작은 마당 둘레의 민도리집 양식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고직사다. 직사와 행랑·창고 건물 등이 들어서 있다.

서원을 둘러봤다면 서원 앞에 들어서 있는 필암서원 유물전시관을 관람해야 한다. 이곳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과 보물 제587-1호로 지정된 필암서원 소속 노비의 인적 사항 등을 기록한 ‘노비보’ 등 69점의 문서를 비롯해 각종 유물이 전시돼 있다. 각종 문서는 서원의 내력과 지방 교육제도 및 당시의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취재협조=필암서원

※ QR코드를 스캔하면 필암서원을 동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출처 : 박영민 기자 < p1721@dema.mil.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