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코리아루트] 유네스코 세계유산 '병산서원'과 '도산서원'

관리자 2021.09.13 15:58 조회 494

사림(士林) 공론의 장소, '병산서원'… 고려시대 '풍악서당'이 전신

학문과 학파 본보기를 이룬 '도산서원'… 인성 교육의 가치 중요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지난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국빈 방한은 21세기 새로운 한·영 협력관계의 버팀목을 놓은 의미 있는 행사로 기록됐다.


특히 영국 여왕이 방문한 경상북도 안동은 많은 문화재와 전통가옥 등 한국적인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된 조선시대 유교문화 유적지다.


한국의 멋과 정취, 전통이 숨 쉬는 하회마을과 도산·병산서원 등 경상북도 안동의 세계유산 현장에서 오는 26일까지 ‘2021 세계유산축전 안동’이 펼쳐진다.


하회마을 대표 전통 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축제 분위기를 북돋우고, 도산서원에서는 퇴계 선생의 도산 12곡 음악회가 열린다.


'병산서원'에서는 서애 선생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풍류 병산 음악극'이 병산서원의 멋진 절경과 '만대루'를 배경으로 진행한다.


우리나라의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세계유산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누리는 '세계유산축전 안동'을 통해 자연과 어우러진 안동 문화의 우수함을 만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한국적인 정취 보존‥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② 한국의 서원 '병산서원'과 '도산서원'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병산서원 [경북도 제공]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병산서원 [경북도 제공]

'병산서원'은 1575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이 현재의 서원 위치(경북 안동)로 옮겨지은 풍산(豊山) 류 씨 가문의 초등교육기구였던 '풍악서당'이 전신이다.


서원의 주향 인물 류성룡은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났으며, 16세기 후반 영의정·도체찰사로서 임진왜란을 수습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징비록』, 『군문등록』 등 여러 저술들을 남겼으며, 병산서원에서는 이를 출판 간행했다. 병산서원은 사림(士林) 활동의 중심지로도 기능했다.


수천 명이 연명한 유소를 올린 서원이며 지역의 공론을 형성하고 종합·산출하는 공론장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원 건축물을 대표하는 것은 누각인 '만대루(보물 제2104호)'다. 이곳에서 유생들은 교류와 유식하며 시회(詩會)를 갖거나, 사회·정치적 현안을 논했다.


'만대루'는 7칸으로 구성된 누각으로 서원 앞의 자연경관을 하나로 합쳐 공간을 연출하는 구조물로 평가받고 있다.


서원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된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의 일부로 포함됐다. 2015년에는 위탁 관리 중인 병산서원 목판이 '한국의 유교책판'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들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9개 서원 중에서 '병산서원'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서원 교육이 끝나면서 많은 서원이 교육을 중단했지만, 재단을 설립해 교육하는 곳은 '병산서원'이 유일하다.


풍산(豊山)에 병산교육재단을 설립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서원 본연의 기능은 '교육'과 '제향'이다. 현재 병산서원을 제외한 서원들은 약 100년 전부터는 제향만 하고 있다.


[경북도 제공]
[경북도 제공]

두 번째는 각 서원에서 교육 기관에 박물관 또는 연수원, 홍보관 등을 건립하는 등 변형을 겪고 있지만, 병산서원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도 연수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병산서원'의 주된 교육은 옛날 서원에서 하던 '강학' 교육(연간 10회)과 서원에서 숙박하며 하는 '체험' 교육(연간 15회)이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가 1543년 소수서원에서 시작했지만, 병산서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한다.


안동으로 몽진 왔던 공민왕(1330~ 1374)이 풍산 앞을 지나며 '풍악서당'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훗날 개성으로 돌아가 풍악서당에 토지와 서책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200년이 지나 서애 류성룡 선생은 부친상을 당해 풍악서당에 강학하러 가니 주변 환경이 공부할 여건이 못돼 현재의 위치로 서당을 옮겼다.


1607년 서애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후학들이 묘를 세워 선생을 기리면서 정식 서원이 됐다. 즉 '병산서원'은 고려시대 '풍악서당'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대원군이 전국의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헐어 없앴지만, 헐지 않은 서원 중 하나가 '병산서원'이다.


서애 선생의 15대 후손이자, 병산서원 지킴이 류한욱(73) 유사는 본지와 인터뷰를 통해 "서원의 목적이 과거 급제를 우선하는 중국의 서원과는 달리 우리나라 서원들은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는데 우선했다"고 전한다.


서원의 유사는 서원의 시설물을 관리하고 운영하며 방문객들의 교육까지 관장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리학을 교육하고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는 공간이 서원이라는 것이다.


특히 서애 선생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자손들과 후학들에게 "선비는 힘을 다하고 좋은 일을 생각만 해서는 이뤄지지 않으니 실천해야 한다"면서 '충·효'를 강조했다.


[경북도 제공]
[경북도 제공]

병산서원 캠프 프로그램 중 하나가 서애 선생의 충효 사상 교육이다. 우리 해군의 이지스함 3척 중 마지막에 건조한 '류성룡함' 장병들은 매년 병산서원에서 1박 2일 동안 체험 교육을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징비록'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줘 충효 교육장으로써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류한욱 유사는 "서애 선생은 당색은 달라도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며 "요즘 정치인들은 나라 걱정보다는 '당리당색'에만 몰두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조선왕조실록』 등 연대기 자료에 의하면, 1611년, 1666년, 1800년, 1832년, 1863년에 병산서원에서 조정에 보낸 유소(儒疏)들에는 서원 관련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 주요 이슈에 대한 의견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다.


서원의 주요 건축물은 ▲사우 존덕사, 전사청(제향 시설) ▲강당 입교당, 재사 동직재, 정허재, 장판각(강학 시설) ▲만대루, 광명지, 복례문(교류·유식 시설)이 있다.


병산서원의 장서와 책판은 2004년(책판)과 2008년(류성룡 저서 및 고문서), 2009년(고서 및 현판)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해 위탁 보관 중이다.


■ 학문과 학파 본보기 이룬 '도산서원'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산서원 [경북도 제공]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산서원 [경북도 제공]


조선에 성리학이 정착하고 서원이 퍼지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모신 '도산서원(사적 170호)'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로 꼽힌다.


이황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이 한국에서 정착하고 체계화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의 성리학 연구와 저술들은 한국의 많은 사림들의 지침서가 됐고, 17세기에는 일본에도 전래돼 영향을 끼쳤다.


퇴계 선생은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등 네 임금을 섬겼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관직에 140회 이상 임명됐으나 절반은 고사했다. 스스로 지은 호 퇴계(退溪)도 '물러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도산서원'은 1575년(선조 8년)에 왕이 현판을 내려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다.


서원은 퇴계 선생이 강회 하던 '도산 서당' 구역과 사후(死後) 추모 공간인 '서원' 구역, 그리고 정조대왕이 퇴계 선생을 특별히 찬양하고 영남 선비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선비 시험을 본 '시사단'으로 구성돼 있다.


도산서당은 당시 새로운 사림들이 정권을 맡을 때 새로운 사상인 성리학으로 심신을 단련해 사회를 지도하고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퇴계 선생의 원대한 뜻을 담고 있다.


서당은 퇴계 선생 생전에 열었으며, 특히 조선 유학의 3대 논쟁 가운데서 '이기론(理氣論)'의 대미가 마무리된 유학사의 업적이 이뤄졌던 건물이다.


서원 내 '농운정사'는 선조(1567∼1608) 치하에서 이름난 선비들과 인연을 맺은 유명한 기숙시설로 알려져 있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학덕(學德)을 계속 이어받고자 선비들이 서원을 설립해 선생의 뜻을 후세까지 전하겠다는 다짐의 장 의미도 있다.


[경북도 제공]
[경북도 제공]

정조(1776~1800)는 퇴계 선생의 학행과 덕행을 존경하고 당시 조선 후기의 한 정파였던 노론 일당 독주화 속에서 소외됐던 영남 선비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특별 과거 시험을 행하게 했다.


퇴계 선생이 조선 유학에 남긴 자취 가운데 사서삼경을 재해석하며 한글로 토를 단 사실은 매우 특이하다. 논어·대학·맹자·중용·시경·서경·역경도 한글로 해석했을 정도다.


송나라 때 성리학으로 송류들이 미처 다 밝히지 못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보완, 실천함으로써 선비가 사회에 나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퇴계 선생은 글 모르는 일반 백성을 위해 한글로 지은 연시조 '도산 12곡'을 통해 백성을 교화했다. 과거시험 공부를 위한 관학이 아닌 선비들이 새로운 공부를 하고 인성 교육을 위한 서원 창설 운동에도 앞장섰다.


또한 '계몽전의(啓蒙傳疑)', '자성록(自省錄)',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등 다섯 가지의 새로운 교재를 만들어 교육 운동을 펼쳐 서원 교류 활성화를 가져왔다.


선비들이 사회에 진출하면 먼저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 불의를 외면하지 말고, 나라가 수난을 겪으면 자기 한 몸의 안이를 돌보지 말고 구국에 동참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장소가 서원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후손인 이태원(73) 유사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퇴계 선생께서는 성리학으로 심신을 단련한 선비들을 길러 새로운 지도 이념인 성리학으로 세상을 이끌고자 하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도산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과 관련해 "보편적 가치와 특수 가치가 있는데, 보편적 가치는 인류 보편의 가치인 사람의 올바른 생활과 지역사회, 가족과 나라에 대한 관계이며, 특수 가치는 성리학의 보편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퇴계 선생이 스스로 지은 호 '퇴계(退溪)'는 '물러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면서 "당시 선비들은 자기가 부족하거나 실증이 드러나면 항시 스스로 물러났는데 현대의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그런 점에서 많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도산서원 목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로 포함됐다. 서원 중심부에 있는 강당인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경북도 제공]
[경북도 제공]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직접 설계 도면을 그리고 지은 '도산서당'을 모태로 한다.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도산서원으로 확장했다.


당시 퇴계 선생의 제자들은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을 모실 사당과 서원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스승이 세운 도산서당을 허물 수도 없고, 다른 곳에 터를 잡아 짓자니 스승이 '도산 12곡'을 지어 부를 만큼 아낀 곳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제자들은 고심 끝에 도산서당 뒤쪽에 서원 건물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역락서재' 등 앞쪽 건물은 퇴계의 작품이고, 전교당과 동·서광명실, 장판각, 상덕사 등은 제자들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서원의 가장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퇴계 선생과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도산서원'은 스승과 제자가 시대를 달리하며 완성한 의미 있는 공간이다. 성리학 관련 고서, 목판을 가장 많이 보유하며, 강회록 등 교육과 관련한 기록도 다수 있다.


'퇴계문집'과 '도산 12곡', 퇴계의 '자성록'과 어록 등 장판강에 있던 목판 2900여 장과, 광명실에 보관했던 서책 5000여 권은 2003년 4월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출처 :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