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 [국방저널 스페셜 한국의 서원] 영주 소수서원

관리자 2022.01.13 09:28 조회 408
1888년까지 뛰어난 인재 양성의 산실 조선 성리학 꽃피우다

영주시 순흥면, 안향 선생이 어린시절 수학한 곳
1550년 최초의 사액서원…성리학 정통성 인정받는 계기
학문 배우는 ‘강학당’·원생들 거처 ‘지락재’ ‘학구재’
교수들 생활하던 ‘일신재’ ‘직방재’·책 보관 ‘장서각’ 등 갖춰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소수서원은 1550년 명종의 편액하사를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소수서원은 1550년 명종의 편액하사를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시대의 서원은 강학 공간, 제향 공간, 유식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서원 주위의 산수 경관과 건축이 합일할 수 있도록 서원 공간을 조성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산수가 좋으면서 서원에 주향으로 모실 선현과 연고가 있는 곳이 서원을 건립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했는데, 소수서원(사적 55호)이 바로 그러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소수서원이 들어선 곳은 영주시 순흥면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鼻祖)이신 안향 선생이 어린 시절 수학한 곳으로 서원의 뒤로는 영귀봉이 있고, 앞으로는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죽계수가 흐르며, 서원 어디에서든 바라볼 수 있는 푸른 연화산이 자리 잡은 곳이다.

경(敬)자 바위와 취한대.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주세붕이 새겼다. 오른쪽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퇴계 이황이 세웠다.
경(敬)자 바위와 취한대.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주세붕이 새겼다. 오른쪽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퇴계 이황이 세웠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1542(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이듬해인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해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됐다.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1549년 1월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을 통해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는 등의 노력 덕분이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으면서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이는 조정에 의해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매표소를 지나 소나무 숲을 지나 맞이하게 되는 소수서원 입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면이 한 단 높아져 이곳부터 서원 경내임을 알 수 있다. 서원 출입문인 지도문으로 통하는 길 왼쪽엔 성생단이 있고, 오른쪽에는 경렴정이 있다. ‘성생단’은 향사에 쓸 희생을 검사하는 단으로 ‘생단’이라고도 한다.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유식 공간이다.

정문인 지도문을 통해 들어서면 먼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인 강학 영역의 중심인 강학당(보물 제403호)과 마주하게 된다. 강학당은 중종 38년에 주세붕이 세운 건물로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이라 이름을 강학당이라고 했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 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크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학당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일반적인 한옥 건물의 옆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앞면으로 설정한 독특한 구조다. 또한, 건물 앞부분 3칸은 대청이고 뒤쪽 1칸에는 방을 둔 이른바 ‘전청후실(前廳後室)’의 특이한 구조다. 대청은 원생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고 방은 교수가 거처하던 공간이다.

강학당 내부 대청 북쪽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운동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기 이전 이름이다.

강학당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는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는 장서각이 있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의 강학 공간에 있는 건물로 두 동의 건물이 조금 떨어져 ‘ㄱ‘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다. 지락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북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남쪽의 2칸은 마루인데, 온돌방과 접하는 면을 제외한 마루의 3면은 모두 개방된 구조다. 학구재도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중앙에 앞뒷면이 개방된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학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다.

강학당 뒤쪽에 있는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생, 교수와 서원의 임원인 원임이 생활하던 숙소다.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독특한 구조로 편액으로 양자를 구분한다. 앞면 6칸, 옆면 1칸 반 크기의 기와집으로 중앙에 2칸 크기의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2칸 크기의 방이 있다. 직방재는 건물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일신재는 왼쪽에 있는 방이다.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칸칸이 나뉜 방들이 매우 아담하다. 집중해 공부하기에는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서원의 장서각은 나라에서 내려준 책과 서원의 책, 서원에서 출판한 목판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현대의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책인 ‘어제내사본’을 비롯해 나라에서 내려준 서책과 각종 책 3000여 권을 보관했던 건물이다.

서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은 제사를 지내는 기능이다. 서원마다 누구를 모셨는가에 따라 그 서원의 품격과 세력이 달라질 수 있어 서원마다 앞다투어 영향력 있는 분을 모시려고 했다. 소수서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보물 제402호)와 전사청, 영정각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묘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묘는 중종 37년에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안향의 고향인 순흥에 세운 사당으로, 소수서원이 세워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일반적으로 사당에는 ‘사(祠)’자를 사용하고 왕이나 나라의 큰 인물을 모신 곳에만 ‘묘(廟)’호를 쓰게 했다. 이는 흔치 않은 일로 문성공 안향을 기리고자 격을 높였음을 알 수 있다. 안향을 모신 이후 중종 39년에 안축과 안보, 인조 11년에 주세붕을 추가로 모셨으며,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소수서원의 건물 배치도 매우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전학후묘(前學後廟)’라고 해 강학 공간 뒤에 제향 공간을 두는데 서쪽 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 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 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다. 또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것으로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과 주세붕 초상(보물 제717호) 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이밖에 향사 시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을 비롯해 서원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관리인이 거처하는 건물인 고직사 등이 배치돼 있다.

소수서원을 방문한 인사들이 남긴 방명록인 심원록.
소수서원을 방문한 인사들이 남긴 방명록인 심원록.

강학공간에 있는 건물인 학구재(왼쪽)와 지락재(오른쪽).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를 하던 곳으로 ‘ㄱ’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다.
강학공간에 있는 건물인 학구재(왼쪽)와 지락재(오른쪽).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를 하던 곳으로 ‘ㄱ’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다.

소수서원의 유물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소수서원은 긴 역사만큼 적지 않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 회화로는 안향 초상, 주세붕 초상, 대성지성문선황전좌도, 이원익 영정, 서총대친림연회도 등이 전해져 온다. 이 외에도 주세붕과 이황의 친필 ‘홀기’와 죽계지·추원록·육선생유고·가례언해 등의 목판과 명종임금이 내린 소수서원, 각 건물의 명칭을 새긴 편액, 시문을 새긴 현판 등이 있다.

서원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서적을 구비하고자 노력했다. 백운동서원 창건 당시 주세붕이 ‘경사자집’에 걸쳐 유가의 기본 서적 500여 권을 마련했다고 하며, 소수서원등록에 의하면 사액되기 전 639책 이상의 서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소수서원에 소장돼 있던 서적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산실돼 현재 서원에 남아 있는 양은 그렇게 많지 않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답게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뛰어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이들 대부분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거나 퇴계 이황의 학맥과 연관이 있다.

소수서원에서 학문을 닦은 사람들의 명부인 ‘입원록’에는 월천 조목, 초간 권문해, 백암 김륵, 학봉 김성일, 성재 금난수 등 당대의 명신 유사들이 기록돼 있다. 이들은 퇴계 이황의 풍기군수 부임을 전후해 사승 관계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나라의 변고가 있었던 시기 외에는 꾸준히 원생을 교육시켜 1888년 마지막 원생을 받을 때까지 4000여 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시킨 인재양성과 성리학 발전의 요람이었다.

글=박영민/사진=이경원 기자(항공사진=주상현 기자)

취재지원=소수서원 관리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