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 온라인 콘텐츠 공모전 수기 부문 당선작
상격 : 최우수상
접수번호 : CIP08310575
성명 : 박O근
제목 : 필암서원, 역사를 틔우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의 역사관이다.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밑줄을 그을만한 행간으로 꼽힌다. 과거의 역사를 고증하여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통찰한다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세상은 변화에 적응하라며 강하게 채찍질한다. 지나간 역사의 겸허한 성찰보다 현재의 특별한 성취와 속도를 강요한다. 영혼이 없는 인공 지능 아래 인류 공생의 따뜻한 정신이 상실될 위험성이 높다. 그렇게 보편성보다 특수성과 빠른 보폭을 벼린다. 자본은 극도로 팽창했지만 사람과 여백이 없다. 혹여 뒤돌아본다 해도 역사는 승자에 대한 기록을 우선한다. 밀려난 패자의 역사는 외면받기 쉽다. 그러나 그 선호의 패러다임을 떠나 패자의 역사도 인류 보편적 가치가 있으면 전승되어야 한다.
43년 전, 형님의 첫 교사 발령지는 전남 장성이었다. 나는 입대하기 전, 인사 차 형님의 하숙집을 찾았다. 그리고 역사 교사인 형님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필암서원’에 들렀다. 서원의 한국적 깊이와 풍광에 놀라 나는 어순을 바꾸어 바로 감탄의 말부터 꺼냈다.
서원을 거닐며 웬만한 해설사 못지않은 형님의 진지한 설명을 들었다. 형님에게서 묘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 시대 같은 고을 황룡강변에서 몸을 키우던 홍길동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 역사적인 별들의 스토리텔링에 내내 가슴이 벅찼었다.
그렇게 ‘필암서원’은 평생 내 가슴 속 별도의 방에 담아둘 만큼 감동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역사'에 대해 자문자답했었다. 내게도 나눠줄만한 역사 한 채쯤은 있을까? 부끄럽지만 없을 것 같았다.
단풍에 홀려 일부러 길을 잃느라 두어 번 내비게이션과 다퉜다. 작년 가을,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차 두 번째로 ‘필암서원’을 방문했다. 다시 첫사랑 같은 내 스물한 살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홍살문 입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청절당과 동·서재에서 옛 유림과 마주했다. 팔작지붕이 화려한 경장각에서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에 반했다. 이윽고 장판각에서 문향을 맡고 우동사에서 제례를 베꼈다. 나는 본래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주인에게 돌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내가 ‘필암서원’에서 빌려 평생 나를 깨우치고 북돋았던 ‘이론과 실천의 균형’이라는 감동이었다.
우리는 그날을 위해 거의 반세기 동안 그리움을 버텼다. 형님의 마지막 여행일지도 몰랐다. 하서 김인후 선생을 기리기 위한 ‘필암서원’은 췌장암을 앓는 형님께서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때 가장 보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앞서 걸어가시는 평생 '역사인'인 형님을 보며 수없이 울컥했다. 형님의 등에 늦가을의 음표가 자맥질했다.
김인후 선생의 고향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필암(筆巖). 붓처럼 생긴 그 바위가 우리들을 마중 나왔다. 거대한 느낌표의 형상이었다. 어질고 반듯했던 선생에 대한 우리들의 큰 찬사를 닮았다.
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역사의 패자였다. 그러나 인류 보편성의 가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그 참혹한 명예를 회복시켰다. 물론 아직 9개 서원의 통합 보존이라는 큰 숙제는 남아 있다. 서원의 중심 사상인 도학(道學)은 이기심을 버리고 도덕적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꼭 필요한 정신이다.
서울로 가는 길, 밤안개가 자욱했다. 오른쪽만 겨우 남은 달이 우리를 끝없이 따라왔다. 초승의 달은 이제 새 살을 틔울 일만 남았다. 문득 자동차에서 전인권의 노래 ‘사랑한 후에’가 장엄하게 흘렀다. 우리는 왜 거기 필암서원에 서 있었는가? 사랑한 후에 남을 그 처절한 부재는 무엇일까? 조수석에 앉은 형님이 숨 죽여 우셨다. 나는 전면의 차창만 응시했다. 이를 악물며 내 울음과 맞섰다.
이제 나도 칠순을 향해 늙어간다. 그러나 초조하지는 않다. 이번 5월, 형님의 묘소에 참 좋아하시던 라일락을 바쳤다. 역사의 근본을 깁고 역사와 자분자분 대화하던 한 이름 없는 역사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필암서원’을 사랑하던 한 남자가 거기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애타게 형님을 부르자 몇 움큼 역사가 싹을 틔워 다시 자라났다. 돌아오는 길, 눈물을 숨기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름 모를 새 떼들이 디귿자로 날아 막 낮달을 자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