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풍경이 있는 에세이] 병산서원의 창(窓)

관리자 2021.09.13 15:39 조회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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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에 고이 간직한 병산, 그 굽이를 따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 나는 계절의 어느 끝자락에서 꿈에도 못 잊을 병산서원을 마음에 두고 짝사랑처럼 그를 그리워했거늘 삶이 고달파 그랬을까. 아니면 무엇에 홀려 이 아름답고 찬란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인지.

어쩔거나, 아직 서원 안으로 들지도 못했는데 마음은 이미 붉은 꽃물로 질펀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드디어 배롱꽃 사열을 받으며 서원의 첫 문인 복례문을 들어선다. 내 몸이 어떤 조짐에 압도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나대는 심장을 어르고 달래느라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학문에 뜻을 두고 출가한, 그토록 사모하고 연모한 님, 저 멀리 배롱나무 뒤에 숨어 님의 그림자라도 보고픈 마음에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온 처자처럼 주책없이 가슴은 왜 이리 벌렁대는지. 복례문 뒤에 몸을 숨긴 광영지를 어찌 잊고 있었나 몰라. 그런데 아, 꽃이 졌구나! 지는구나! 벌건 대낮에 연못을 핏빛으로 물들인 저 분분한 낙화, 배롱나무 그림자는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색동저고리 처자들은 맨몸으로 환한 9월 오후를 보내고 있다.

단정하기 이를데 없는 작은 쪽창
바깥의 풍경 자연스럽게 들이고
자연채광과 건물 수명 좌우하는
통풍 기능까지… '중요한 역할'


건축의 백미라는 표현은 너무 진부하려나. 그래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창(窓), 이것은 누가 뭐라 해도 한국 건축물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병산서원에서 기숙사로 썼다는 동재 서재에서 나를 오래 머물게 하고 매료시킨 것도 바로 저 단정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 쪽창이다. 열어둔 문 사이로 '여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듯 창밖으로 어룽대는 백일홍 붉은 가지는 한지창이 주는 단아하고 정갈한 분위기에 과함도 모자람도 없이 소박하면서도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등을 떠밀거나 끌어당기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들 스스로 붉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뿐히 몸을 던졌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지난 밤 병산 너머 낙동강 건너 서원의 담을 넘어 이곳 광영지에 누가 다녀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간이 흐르면 저 꽃잎들, 나무도 꽃도 아닌 연못의 일부 아니 병산의 저 깊은 골짜기가 되어있을까.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설처럼 서원을 돌아보고 복례문을 나서는데 노을이 아, 저 꽃빛 강물이….

서원을 방문했을 땐 우선 전체적으로 큰 그림부터 보는 것이 좋다. 그 다음 제 각각의 건물이 앉은 자리와 건물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그 조화를 보며 마음에 두었던 건물이라면 작지만 부분을 보는 방법이다. 나의 경우 서원의 전체 배치도를 살핀 후엔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피는 편이지만 마음이 동하면 숨어있는 후원이나 작은 구석을 집중해서 보는 걸 좋아한다.

지금은 서원 전체에 배롱꽃이 계절을 알리지만 낙동강물을 따라 봄이 서원에 도착했다는 신호로 중정에 홍매(紅梅)와 청매(靑梅)가 동서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러하므로 병산서원, 어느 계절인들 미쁘지 않으랴.


서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


유럽의 오래된 집(성)이나 건물창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개방적이라면, 한국 고건물의 특징은 머리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과 적재적소에만 두는 작은 창이다.

한국건축물에 있어 문과 창은 이쪽과 저쪽의 공간분할은 물론 보는 이로 하여금 피안과 차안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찰도 그렇지만 서원의 경우,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되기까지는 건물이 놓이게 될 위치와 용도에 따라 대목(大木)이 전담하는 부분과 소목(小木)이 전담하는 부분이 엄격히 구별되어 있으며, 업무를 세분화하여 전문성을 최대로 살렸을 때 크고 작음을 떠나 하나의 건축물에서 문이나 창 하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작은 창만 보더라도 서원이든 궁이든 용도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단순히 출입의 기능을 갖는 문과 출입이 목적이 아니라 바깥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이는 기능,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연채광과 건물의 수명을 좌우한다는 통풍 기능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건축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가 창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인자 시인·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