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 서원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9개 서원 소개

사림 공론활동의 장소로서 기능한안동 병산서원 (사적 제260호)

역염선사(力念善事) 힘을 다하여 선한 일만 생각하고,
역행선사(力行善事) 힘을 다하여 선한 일만 행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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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주요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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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의 개요

역염선사(力念善事) 힘을 다하여 선한 일만 생각하고,
역행선사(力行善事) 힘을 다하여 선한 일만 행하여라.

병산서원 전경

류성룡(1542~1607)의 시입니다. 짧고 간결하나, 살며 실천하기에는 참으로 무겁습니다.

류성룡은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현재의 ‘병산서원’ 터로 옮겼습니다.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뒤, 지역 유림이 풍악서당 안에 그를 추모하는 사당인 ‘존덕사’를 세우면서 서원이 되었습니다. 4년 뒤, 서원 앞 강 건너 병풍 모양으로 둘러서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병산서원’으로 바꾸었습니다. 1863년 철종이 ‘병산서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 존덕사

  • 입교당

  • 만대루

병산서원은 한국서원의 기능이 ‘교육’에서 ‘공론의 장’으로 넓혀진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나라 최초로 수천 명이 뜻을 모아 상소를 올린 서원입니다. 이렇듯 지역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뜻을 모으고 조정했습니다. 병산서원에 간직된 갖가지 고문서들은 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붉게 타는 배롱나무 꽃그늘을 지나 외삼문인 ‘복례문’에 들어서면 병산서원의 랜드마크 ‘만대루’입니다. 사방이 트인 누마루에 오르면, 낙동강 넓은 모래밭과 그 건너 병산을 7폭 병풍에 이어 담고 있습니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가 쓴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은 해질녘에 마주 대할만하고(翠屛宜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름처럼 해질 무렵 이 ‘만대루’에 올라 강 건너 짙은 파노라마 ‘병산’을 마주 바라보면, 산 아래 강물에 내리는 노을이 화려합니다. 병산서원은 단조롭지만 품격을 지키며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건축물이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공간’으로 완성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 정허재

  • 장판각

서원의 앞마당에는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 몸 추스르며 마음까지 단속하던 옛 선비의 기품이 서려있습니다. 기숙사인 ‘동직재’와‘정허재’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책을 찍을 때 쓰이는 목판과 책을 보관하던 ‘장판각’은 ‘입교당’ 뒤 왼쪽으로 비켜서 있습니다. 화재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뒤에는 사당인 ‘존덕사’가 있습니다. 사당을 강학당 뒤에 동쪽으로 치우치게 세운 것은 퇴계학파 서원의 특징입니다.
이렇듯 병산서원의 ‘선현의 학덕을 추모하는 제향공간’, ‘세상 이치를 탐구하며 책을 읽고 토론하는 강학공간’, ‘자연의 변화 속에서 그 이치를 깨닫는 유식공간’등은 모두가 성리학의 ‘바르고 선한’ 전인교육으로 채워집니다.

병산서원은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2010년)과 ‘한국의 서원’(2019년)

병산서원의 제향

사당 가운데에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그의 아들 류진은 옆면에 모시고 있습니다. 병산서원에서는 ‘음복례’에 앞서 ‘이번 향사에 결례나 실례가 있었는지 점검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나이어린 집사가 “제사공론 합시다”라고 하면 “제향에 결례는 없었습니까”라고 묻고, 공론이 마무리 되면 “제사공론을 파합시다”라고 합니다. 끝까지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음력3월 9월에 향사를 지냅니다.
  • 존덕사

  • 존덕사 내부

  • 내삼문

제향 인물

류성룡은 이황의 제자로 스물네 살에 벼슬을 시작해, 임진왜란 때 행정과 군사를 도맡은 영의정으로 ‘징비록’, ‘군문등록’ 등 여러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순신의 친구이자 후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년을 고향인 하회마을에서 지내며 도학, 문장, 글씨,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류진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류성룡의 셋째 아들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아버지 류성룡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스물아홉 살에 사마시에 합격한 류진은 ‘류성룡의 아들답게’맑고 바르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저서로 시문집 ‘수암집’이 있습니다.

병산서원의 강학

17세기 중반부터 대부분의 서원에서는 ‘강학’보다 ‘제향’을 앞세웠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병산서원은 18세기 후반까지 강학의 전통을 고집스레 이어갔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4일 동안 107명이 ‘통독’이라는 형식으로‘대학’을 배우고 토론했습니다. 또 다른 자료에는 18세부터 40대까지의 원생들이 ‘대학’‘중용’‘주서’‘시전’‘논어’‘서전’‘심경’‘주역’‘맹자’‘예기’순으로 공부했습니다. 이렇듯 병산서원의 적극적 강학기능은 근대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1946년 서원 재산으로 ‘병산교육재단’을 설립해서 ‘서원학교’라고 불리는 ‘풍산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입교당

병산서원의 교류 및 유식

병산서원의 유식공간은 ‘만대루’와, 그곳에서 바라보는 주위 경관으로 이루어집니다.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만대’라는 이름답게, ‘만대루’가 이루어내는 공간은 가히 시적입니다. 이곳 누마루에 오르면 남쪽으로 ‘병산’과 ‘낙동강’이 그림처럼 열리고, 뒤를 돌아보면 아늑한 서원 전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습니다. 유생들은 이곳 누마루에 둘러앉아 유식도 하고, 수려한 풍광 속에 하나되어 시를 짓고 노래했습니다.
  • 만대루

  • 광명지

  • 복례문

문화재 & 기념물

류성룡은 학자이자 문신으로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국보로 지정된‘징비록’은 임진왜란때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이 전쟁이 끝난 뒤 옷을 벗고 고향으로 내려와 하회마을에 머물면서 기록한 필사본입니다. 임진왜란 전 일본과의 관계, 그리고 전쟁을 하면서 일어난 백성들의 항쟁, 명나라의 구원 등 임진왜란 전후 7년 동안의 사정을 상세하게 적어놓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책입니다. ‘난후잡록’,‘진사록’,‘군문등록’등도 그가 겪은 임진왜란의 기록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2020년, 병산서원의 만대루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 징비록(국보 제 132호)

  • 만대루(보물 제 2104호)

  • 류성룡 종가 문적(보물 제160호,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