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 서원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9개 서원 소개

성리학에서 예학을 세부적으로 연구한논산 돈암서원 (사적 제383호)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이듯 포용하라.
학문을 넓고 깊이 익혀서 예(禮)를 실천하라.
아침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성을 길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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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주요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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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의 개요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이듯 포용하라.
학문을 넓고 깊이 익혀서 예(禮)를 실천하라.
아침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성을 길러라.

돈암서원 전경

‘돈암서원’사당인 ‘숭례사’앞 꽃담에 한문 12자로 적혀 있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유학자 김장생(1548~1631)의 교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실천이 참 어려운’가르침입니다.

김장생이 살았던 16~17세기는 참혹한 사화와 반란, 임진・정유년의 왜란 등 잦은 전쟁으로 나라가 온통 혼란을 겪던 때였습니다. 더 이상 성리학 이념만으로는 무너진 사회기강과 윤리의식을 바르게 세울 수 없어, 그 수습 대안으로 ‘예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김장생의 ‘예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이념과 정치철학은 국가적으로 절실한 리더십이었습니다.
김장생은 송익필과 이이의 가르침 속에 성리학을 배우고 이어받아, 17세기 조선의 ‘예학’을 추스른 학자입니다. 그가 3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김계휘가 세상을 떠나자 ‘상례’와 ‘제례’를 집안의 예법대로 따랐는데, 이듬해 김장생은 신의경이 편집한 ‘상제서’를 일반인이 쓰기에 편하도록 정리했습니다. ‘상례비요’입니다. 52세에는 관혼상제의 예를 연구한 ‘가례집람’을 완성했습니다. 이렇듯 돈암서원은 예학 실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숭례사

  • 응도당

  • 산앙루

충남 논산에 있는‘돈암서원’은 1634년 김장생의 제자들과 지역 사림들이, 이곳에서 1.5km 떨어진 ‘숲말’에 처음 세웠습니다. 그 뒤 1660년 현종이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돈암’은 ‘숲말’에 있는 바위 이름입니다. 홍수 때에는 물이 뜰까지 넘쳐 들어왔습니다. 때문에 1880년 지금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서원은 낮은 구릉지에 동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문인 ‘입덕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양성당’을 중심으로 동재 ‘거경재’와 서재 ‘정의재’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양성당’앞에는 송시열이 쓴 ‘돈암서원 원정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양성재’의 서편에는 책판과 왕실의 하사품 등이 간직되어 있는 ‘장판각’입니다.
  • 입덕문

  • 양성당

특히 예학 이론을 건축에 담은 ‘응도당’은, 김장생이 예학서 ‘가례집람’에 그려놓은 도면대로 지어졌습니다. ‘도가 머무르는 곳’이라는 ‘응도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칸살이 넓고 맵시가 훤칠합니다. 맞배지붕에 양쪽 비바람을 막아주는 풍판, 그 아래 눈썹처마를 달았습니다. 한국 서원의 강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이곳 ‘응도당’에서, 예학 토론과 활발한 저술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때문에 돈암서원에는 많은 목판과 예학 이론서가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돈암서원의 제향

돈암서원에서는 향사 40여 일 전에, 원장이 주재하는 장의회의를 열어서 헌관과 집사를 선임합니다. 선임된 제관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우편으로 알리고 당사자의 동의를 얻습니다.
한편 향사를 시작하기 앞서, 고종 때 왕실에서 보내준 벼루‘내사연’에 먹을 갈아서 축문에 초헌관 이름을 적습니다. 이 벼루는 함께 받은 ‘옥등잔’과 함께 귀하게 간직하다 제향 때만 소중하게 다루어 사용합니다.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 숭례사

  • 향사

제향 인물

사당 ‘숭례사’에는 김장생을 중심으로 그의 둘째아들이자 제자인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을 모셨습니다.
17세기 조선의 예학 연구를 이끈 김장생은 중앙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송시열은 김장생에게 예학을 배웠으나,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송준길은 이이와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효종에게 발탁됐습니다. 예학 이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한 이 네 분은 성균관 문묘에 모셔졌습니다.

돈암서원의 강학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한 김장생은 그것을 ‘예(禮)’라 했습니다. 그는 이 ‘예’를 보다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 주희의 ‘가례’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쉽게 고치고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습니다. 김장생은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기호학파(경기도와 충청 지역중심의 성리학파)로, ‘예’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후학을 두루 양성했습니다.
  • 응도당

  • 양성당

  • 정의재, 거경재

돈암서원의 교류 및 유식

  • 산앙루

돈암서원을 찾아 들어서면, 정돈된 담장 한가운데 ‘산앙루’가 정중하게 맞아줍니다. 여느 서원처럼 옛 선비들이 둘러앉아 시를 짓고, 토론하고, 그림을 그린 ‘그 시대의 유식공간’이 아니라 2006년에 다시지은 ‘현대식’입니다.
그래선지 이 탄탄한 누에 올라서면, ‘옛 선비’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보입니다. 둘러보니 그 속에 ‘나’도 있습니다. 거친 세파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나는 선한가? 이웃과 사회에 바르게 이바지하는가? 나라를 사랑하는가?”라고.

문화재 & 기념물

‘응도당’은 보물 제1569호입니다. 김장생의 예학 관련 저술인 ‘상례비오’,‘가례집람‘, ‘의례문해속’은 목판본과 함께 돈암서원 장판각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고종때 왕실에서 하사한 ‘벼루’와 ‘옥등잔’도 있습니다.
  • 응도당(보물 제1569호)

  • 돈암서원 원정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 돈암서원 유경사(숭례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