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리포트-[반갑다! 문화재] (49)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안동 병산서원

관리자 2022.10.31 16:53 조회 307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산 유씨(柳氏) 교육기관 풍악서당
조선 선조 5년(1572년) 서애 유성룡이 현재 위치로 옮겨
한국 서원 건축 최고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낙동강 가장자리에 자리잡아 가장 아름다운 서원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병산서원 (신정일 기자)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낙동강 가장자리에 자리잡아 가장 아름다운 서원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병산서원
(신정일 기자)

나라 안에 가장 아름다운 서원 중 한 곳인 병산서원은 안동시 풍천면 낙동강 변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하고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거나 후진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으나 갈수록 향촌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사림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림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그들의 결속을 다졌고 세력을 키운 뒤 중앙 정계로 진출할 기반을 다졌던 곳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해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됐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유씨(柳氏)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년)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에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했으며, 1863년(철종 14년)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됐다. 성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했으며,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입교당(立敎堂)·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장판각(藏板閣)·동재(東齋)·서재(西齋)·만대루(睌對樓)·복례문(復禮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존덕사에는 유성룡을 주벽(主壁)으로 유진의 위패가 배향돼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특히 기단 앞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 놓은 대석(臺石)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고 한다. 강당인 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에 겹처마로 돼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樑)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祭官)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향사시 제수를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각각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문루(門樓)인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고자(庫子)가 개좌와 파좌를 외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팔작기와집에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돼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中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돼 있으며,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대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돼 있다.

묘우(廟宇)인 존덕사에는 유성룡을 주벽(主壁)으로 유진의 위패가 배향돼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특히 기단 앞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 놓은 대석(臺石)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고 한다. 강당인 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에 겹처마로 돼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樑)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祭官)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향사시 제수를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각각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문루(門樓)인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고자(庫子)가 개좌와 파좌를 외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팔작기와집에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돼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中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돼 있으며,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대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돼 있다.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신정일 기자)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신정일 기자)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홍준 선생은 병산서원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 병산서원은 우리 나라 내로라 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환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현히 하나가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

<영가지永嘉誌>(선조 41년(1608년)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 읍지)에 첨부된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고 표현된 병산은 유성룡이 살았던 그 시대에도 저렇게 푸르렀을 것이다.

이곳 병산서원에 모셔진 유성룡(1542~1607)의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이견(而見)이며, 호는 서애(西厓)로,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스물 한 살 때 형인 겸암 유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받았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고 했고, 이항복은 “이분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유성룡은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을 거친 후 예조·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정여립 모반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국공신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정치가로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서를 주고 실전에 활용케 하기도 했다.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홍준 선생은 병산서원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 병산서원은 우리 나라 내로라 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환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현히 하나가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

<영가지永嘉誌>(선조 41년(1608년)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 읍지)에 첨부된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고 표현된 병산은 유성룡이 살았던 그 시대에도 저렇게 푸르렀을 것이다.

이곳 병산서원에 모셔진 유성룡(1542~1607)의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이견(而見)이며, 호는 서애(西厓)로,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스물 한 살 때 형인 겸암 유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받았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고 했고, 이항복은 “이분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유성룡은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을 거친 후 예조·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정여립 모반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국공신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정치가로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서를 주고 실전에 활용케 하기도 했다.

경상북도 안동 병산서원 앞 병산 모래사장 (신정일 기자)
경상북도 안동 병산서원 앞 병산 모래사장 (신정일 기자)

그는 말년인 1598년에 명나라 경락 정운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았다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됐으나, 그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는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 고향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과 <서애집>, <신종록>, <영보록>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가 병들어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궁중 의원을 보내어 치료케 했지만 65세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해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의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실록의 사관은 다음과 같이 그를 평했다.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그러나 칭찬의 말 뒤에는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드린 적이 별로 없었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은 구해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유성룡은 총명했지만 정여립같은 과격한 성품은 아니었고,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맞서 있을 때에도 동인에 속해 있었지만 서인에게도 항상 은건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조정에 분란이 생길 때마다 중간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선조가 어느 날 조정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었다.

“과인을 예전의 성군인 요․순과 폭군인 걸․주에 비긴다면 어느 쪽이겠는가?”

이에 정이주는 “요·순과 같은 군주이옵니다”라고 말했고, 김성일은 “걸·주와 같사옵니다“라고 말했고, 김성일의 말에 선조는 안색이 변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유성룡이 ”둘 다 바른 말입니다. 정이주는 장차 전하의 성덕을 바라는 뜻이요. 김성일은 전하께 경계를 드리는 말인 줄 아옵니다“라고 말해 어색한 자리를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조선 500년 역사 속에서 가장 격랑의 시대를 살았던 유성룡의 자취가 남아 있는 병산서원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돼 오늘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출처 : 신정일 기자 - 더리포트(http://www.therepo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