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 [한국의 서원] 배움에 차별 없이… 향촌민과 함께하다

관리자 2022.07.14 10:48 조회 341
정읍 무성서원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치적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워
1868년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아
마을 중심부 위치…지역 문화 선도하며 사회적 책임
정읍 무성서원은 한국 서원의 발전 과정에서 지역 단위 지식인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성리학 이념이 확대된 서원의 양상을 보여 준다. 사진은 무성서원 전경.
정읍 무성서원은 한국 서원의 발전 과정에서 지역 단위 지식인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성리학 이념이 확대된 서원의 양상을 보여 준다. 사진은 무성서원 전경.

내삼문. 이 문을 통해야 태산사로 들어갈 수 있다.
내삼문. 이 문을 통해야 태산사로 들어갈 수 있다.

무성서원은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태산 태수로 부임해 8년 동안 선정을 베풀고 많은 치적을 남기고 떠나자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고 한 데서 유래됐다. 이후 1544년(중종 39년)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신잠(申潛·1491~1554) 선생이 6년에 걸쳐 선정을 베풀다 강원도 간성군수로 전임돼 떠나자 주민들이 최치원 선생과 같이 생사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태산사와 합했다. 그 후 1615년(광해군 7년) 고을 유림이 서원을 세웠으며 1696년(숙종 22년) ‘무성서원(武城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1401~1481)을 비롯해 송세림(宋世琳·1479~?), 정언충(鄭彦忠·1706~1771), 김약묵(金若默·1500~1558), 김관(金瓘·1425~1485) 선생을 추가로 배향했다.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서원

앞에는 개울물이 흐르며 뒤에는 성황산(城隍山)을 등지고 자리한 무성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전라북도 내 유일한 서원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6)과 돈헌 임병찬(林秉瓚·1851~1916) 선생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호남 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무성서원이 자리한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는 서남쪽에 솟은 칠보산에 기대어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전면과 좌우에 넓은 들이 있고 들 가운데로 칠보천이 흘러 마을 북편의 동진강에 합수된다. 성황산을 배경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 형국을 이루는 이곳의 중심부에 무성서원이 있다. 무성서원은 서원의 일반적인 입지 조건과 달리 향촌 내, 그것도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향촌민과 함께하면서 지역문화를 선도하며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미를 이곳에서 읽을 수 있다.

무성서원은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곳에 남북 방향으로 자리 잡은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墓)식 배치 형태로 서원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건축물로 이뤄져 있다. 사당인 태산사와 강당, 강수재, 외삼문에 해당하는 현가루, 그리고 내삼문과 고직사 등으로 서원의 기본적인 배치 구조를 조성하고 주변에는 각종 비석과 비각이 놓여 있다. 서원 정면의 현가루에서 사당에 이르기까지 남북 중심축선을 두고 그 축선을 따라 뒤로 가면서 현가루, 강당, 내삼문, 사당을 배치한 후 주위를 담장으로 둘렀다.

흥선대원군의 형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의 불망비 등 무성서원 보존에 공이 있는 사람의 공덕비 등이 현가루 옆 담장 앞에 서 있다.
흥선대원군의 형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의 불망비 등 무성서원 보존에 공이 있는 사람의
공덕비 등이 현가루 옆 담장 앞에 서 있다.

‘어려운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무성서원에 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문화해설사 사무실을 찾았다. 안인례 문화해설사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줬다.

안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무성서원을 향하는 길에 처음 맞이하는 것이 홍살문이다. 다른 서원과 달리 홍살문 옆에 일반 주택들이 있어 그 모습이 낯설다. 이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누구나 함께 서원에서 배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서원 설립 취지를 엿볼 수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전면에 외삼문에 해당하는 현가루가 보인다. 무성서원에는 외삼문 대신 1891년 건립된 전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가 들어서 있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말이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돼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러한 현가루 문을 들어서면 1828년(순조 28년)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학공간으로 사용되는 강당이 있는데, 좌우에 방이 배치돼 있고 중앙 3칸의 마루는 앞뒤가 트여 있는 특징을 보인다. 강당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을 보면 1696년(숙종 22년) 사액됐음을 알 수 있다.

강당을 보면 한가운데 3칸이 벽체 없이 트여 있어 내삼문의 태극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움의 담백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조형이다. 그 옛날 무성서원에서 공부하던 군더더기 하나 없이 반듯했을 선비의 모습 그대로다. 의연함을 잃지 않고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의 강당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중요한 덕목인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도 언행을 삼감) 그 자체다.

이처럼 강당의 앞뒤가 트인 것은 지금까지 봐 온 다른 사원들과 달랐다. 이는 학업을 증진하는 선비들이 뒤에 있는 태산사를 바라보며 흐트러진 마음을 잡아 학업에 열중하라는 뜻에서 이렇게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동행한 안 해설사의 설명이다.

강당에서 바라본 현가루. 학업에 지친 선비들은 휴식공간인 현가루에서 시와 음률을 나누며 심신을 달랬다.
강당에서 바라본 현가루. 학업에 지친 선비들은 휴식공간인 현가루에서 시와 음률을 나누며 심신을 달랬다.

최치원의 풍류정신 이어 유토피아 구현

강당을 지나 자연석 계단을 오르면 사우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있다. 내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태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1484년(성종 15년) 창건하고 1844년(헌종 10년) 중수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상춘곡’으로 널리 알려진 불우헌 정극인 선생 등 7위가 모셔져 있다.

강당 우측 협문을 나서면 기숙사인 강수재가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기숙사인 동서 양재가 있으나 무성서원은 현재 동재인 강수재만 남아 있고, 서재는 당시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비(碑)만 강수재 뒤편에 있다.

이곳 강수재 마당에는 2칸의 비각과 하나의 비가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 비각 안에는 ‘정문술중수의조비’가 있고, 또 하나의 비각에는 ‘최영대영세불망비’가 있다. 그리고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6월 13일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찬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세운 ‘병오창의기적비’가 서 있다.

마당엔 서원 관리인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서원의 향사 때 필요한 제수품을 준비하고 서원의 살림을 맡아 보는 고직사가 자리하고 있다. 강당 좌측에는 1828년 강당을 중수한 태인현감 서호순의 공덕을 기리는 ‘서호순불망비’와 비각이 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형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의 불망비 등 무성서원 보존에 공이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비석과 무성서원 중수기념비 등이 현가루 옆 담장 앞에 서 있다.

“최치원 선생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풍류는 유교·불교·도교를 아우르는, 어쩌면 뛰어넘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1100여 년 동안 고운 최치원의 풍류정신을 이어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구현해 온 정읍 무성서원. 이 시대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거듭나 새로운 의미의 서원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라는 안 해설사의 말에서 서원이 왜 보존되고 지켜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영민 기자/취재 협조=정읍시청 문화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