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안동 도산서원] 서원을 정착 시킨 퇴계 이황의 사상이 깃들다

관리자 2022.07.12 09:18 조회 255
동쪽이 편안하다 뜻 ‘안동’…역사·문화의 보고
도산서당 모태…성리학 이념 구현 학문의 전당
선조로부터 ‘도산’ 사액 받아…퇴계 위패 봉안

안동 도산서원은 서원을 한국적인 토대에 맞게 정착시킨 퇴계 이황의 사상이 깃든 곳이다.

가는 길은 멀지만 당도하고 나면 금방이다. 안동 도산서원까지의 여정이 그렇다. 만만치 않은 거리이지만 도착하면 한달음이다. 첩첩이 쌓인 산으로 난 도로를 지나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하늘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달려온 길이었다. 살갗을 델 만큼 따가운 햇볕일망정 내처 향하는 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

안동은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를 자부하는 고장이다. ‘정신문화 수도’라는 문구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안동’(安東)이라는 지명에 담긴 ‘동쪽이 편안하다’라는 뜻이 맘에 든다. 부와 명예와 지위보다 더 귀한 가치가 편안함, 평안이다. 그곳에 가면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편안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안동이 주는 부수효과는 그렇게 정신적인 영역을 지지한다.

낙동강 너머에 있는 시사대는 조선시대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했다.

풍경이 압권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안온하게 감싸 안은 형국이다. 이런 곳에 서원을 지은 이의 마음이 전해온다. 물 흐르듯 무엇에든 얽매이지 않고 학문의 자유를 누리라는 뜻일지. 아니면 아늑한 산처럼 모든 것을 품어 은일자중의 삶을 살라는 뜻인지, 그 깊은 속뜻이 다함없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서원 가운데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이 생전에 지은 도산서당이 모태가 됐다. 서원에 가기 전부터 익히 그 명성으로 기대가 부풀었다. 문화유산을 알현하는 것 중 제일의 기쁨은 보는 맛이다. 눈으로 먼저 유산의 품격이 들어온다. 백날 말로 들어야 소용이 없다. 눈으로 그 찬란을 확인한 뒤라야 지고한 뜻도 감응이 된다.

서원 앞 넓은 마당 앞에서 저편 강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야가 탁 트인다. 시원한 바람은 불어오지 않지만 무엇 하나 걸림이 없어 자유롭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그저 고요하다. 조금의 허투룬 소음없이 그저 적막할 뿐이어서 이편의 마음을 다독인다. 세상의 지치고 피로한 마음이 가뭇없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풍경은 치유의 힘이 있나 보다.

강물 건너편에 정자 같은 구조물이 보인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다. 이름하여 시사단(試士壇). 과거가 열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온다. 여기에는 정조의 퇴계 이황을 향한 흠모의 마음도 깃들어 있다 하니 시대를 초월해 학문과 신뢰로 이어진 군신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정조는 1792년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개최했다.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함이었으며, 한편으로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강물 너머 저편에서 도산서원을 바라보는 시사단은 마치 헤어질 수 없는 연인간의 정을 보여주는 듯 하다.

도산서원의 모태가 됐던 도산서당.

도산서원의 비경은 그러나 따로 있다. 사실은 입구에서 서원으로 향하는 길이 더 아름답다. 전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런저런 나무가 버성기듯 줄지어 늘어선 풍경은 종요롭다. 길 너머 우편에 남실거리는 물빛은 한 폭의 수채화를 떠올리게 한다. 10여분 남짓 걸어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강과 땅의 조화는 삿된 언어를 물리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을 배향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 성리학 이념을 구현하는 학문의 전당이다. 퇴계는 독자적으로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킨 대학자다. 그가 주장한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의 결합으로,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성리학이론”을 일컫는다.

퇴계는 일상에서의 교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선비가 바로 서고 풍습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논지를 견지했다. 선비가 본을 보이는 수련의 공간으로서의 서원을 상정하고, 이를 일상생활에 접목했다.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로 주저없이 이황을 꼽는 것은 그런 연유와 무관치 않다.

도산서원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 언급한 대로 퇴계가 생전에 지은 도산서당과 사후에 지은 도산서원이 결합된 구조다. 김희곤이 펴낸 ‘한국의 서원’(미술문화, 2019)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배치도를 살펴보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瀧雲精舍)는 적당히 떨어져 자연스럽게 배치되었지만 상부의 도산서원 영역은 축을 따라 질서정연하다. 이황 선생 생전과 사후의 이원 배치 구조를 갖춘 서원 경관은 전형적인 전저후고의 형식을 따른다. 도산서당을 지은 건축가는 누가 뭐래도 이황 선생이며 그의 손길이 서당 곳곳에 남아 있다. 경주 독락당(獨樂堂)이 이언적 선생의 작품이라면 도산서원은 이황 선생의 작품이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이 독락당에 미치지 못하듯 도산서원도 도산서당을 뛰어넘지 못한다.”

도산서원은 1574년 착공해 1년 만에 완공됐다. 그리고 당시 선조로부터 ‘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곳의 사당은 1576년 완공돼 퇴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면서 사실상 서원의 형태가 마련됐다.

특유의 정취를 발하는 오솔길.

서원 앞 널찍한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전체적인 전저후고의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동, 서재와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 대칭을 이루듯 자리하고 있다.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 기능을 담당했던 광명실이라는 현판은 퇴계선생 친필이다.

소나무와 조경수가 에워싸듯 단정한 도산서당은 그 기품과 품위가 멋스럽다. 마치 퇴계의 학덕을 보여주듯 올곧으면서도 담박하다. 서원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一자 형태의 3칸 건물이다. 특히 가르침과 휴식의 공간이었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라는 겸손의 뜻이 담겨 있다고 전해온다.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도 퇴계의 후학을 아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시적인 명칭은 정치한 학문과 문예적 감성을 아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공(工)자형의 대칭이 이색적이다. 문을 열면 무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글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청춘들이 있을 것만 같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