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5] 대구 도동서원(上)...입구 400살 은행나무부터, 삐뚤빼뚤 기단석까지 '색다른 멋' 가득

관리자 2021.04.28 10:21 조회 7
김굉필 덕행 기리기 위해 건립
도동리로 옮겨 '도동서원' 사액
공자의 道 동쪽으로 왔다는 뜻
폭 좁은 계단 등 예법위한 건축
중정당·사당·담장은 보물 3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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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강당 건물인 중정당. 기둥 상부에 흰 창호지를 발라 놓았다. 이는 도동서원이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평가 받는 김굉필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서원 중 수위(首位) 서원임을 나타내고 있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에 있다.

도동서원은 1568년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처음 건립되었고,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5년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다. 이때의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이 한강(寒岡) 정구(1543∼1620)다.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3년 후인 1610년에 김굉필의 위판을 본안하고 서책과 전답, 노비 등을 하사받아 원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678년에 정구가 배향되었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김굉필에 의해 '공자의 도,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고,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 건축이 갖추어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갖추고 있는 대표적 서원이다.

김굉필 문집인 '경현록(景賢錄)' 중 보로동서원 건립 관련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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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당의 기단석. 각기 다른 모양·크기의 돌로 세웠다.

'현풍 오설리 보로동(甫老洞) 선생의 무덤 곁에 있다. 처음에 융경(隆慶) 무진(戊辰:1568)년에 현풍의 선비들이 선생을 위해 읍내에서 동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다. 정당(正堂)은 중정(中正)이고, 좌실은 동익(東翼)이요, 우실은 서익이다. 동재는 거인(居仁)이라 하고, 서재는 거의(居義)라 했다. 또 구용료(九容寮), 구사료(九思寮), 사물료(四勿寮), 삼성료(三省寮)가 있다. 또 양정재(養正齋)가 있어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문은 환주(喚主)라 했다. 시내 위에다 정자를 지어 명칭을 조한(照寒)이라 하려고 했으니, 선생의 '지호명월조고한(只呼明月照孤寒)'이란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앞으로 두 시내가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흐르는 까닭에 명칭을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하고, 사실을 갖추어서 위에 아뢰니 액호(額號)가 내리고 서적도 내렸다. 그 후 임진년 병화(兵火)에 불타 버렸다.

을사(乙巳:1605)년에 다시 중수했다. 옛터는 인가들이 곁에 가까이 있고 장터가 있어서 시끄러운 까닭에 공부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또 선생의 발자취가 평소에 미치지 않았던 곳이어서 거기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 연고(緣故)가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이곳에 옮겨지었다. 지금 먼저 사우(祠宇)를 세우고 재당(齋堂)과 주방, 창고 등은 미처 세우지 못했다.'

◆보물로 지정된 중정당·사당·담장

서원에 가면 입구 아래 400년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김굉필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은행나무를 지나 서원으로 올라가면 입구에 누문인 수월루(水月樓)가 보인다. 주자(朱子)의 시 구절인 '공손히 생각하니 천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에서 가져온 것이다. 수월루를 지나면 사모지붕(추녀마루가 지붕 가운데로 몰려 네모뿔 모양으로 된 지붕)의 환주문(喚主門)이 나오고, 일직선상으로 강당인 중정당이 마주 보인다. 서원 정문으로 좁고 낮은 이 환주문의 '환주(喚主)'는 '내 마음의 주인공(主)이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의미다.

도동서원에는 눈길을 끄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인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방 앞쪽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이 중정당에 '도동서원' 편액이 두 개 걸려 있다. 앞쪽 처마에는 이황 글씨를 집자한 '도동서원'이, 마루 위 뒤쪽 벽면에는 당대 명필이자 경상도 도사(都事)였던 배대유가 1607년에 글씨를 쓴 사액편액 '도동서원'이 걸려 있다.

중정당의 기둥을 부면 상부에 흰 창호지를 발라 놓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도동서원이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평가 받는 김굉필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서원 중 수위(首位) 서원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중정단의 기단에 특히 볼거리가 많다. 높은 기단의 기단석을 보면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이다. 모양이나 크기, 색깔, 돌의 재질 등이 다 다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더 특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원을 지을 때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선비들에게 알려 저마다 쓸 만한 돌을 하나씩 가져오게 한 뒤 다듬어 쌓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석조 기단에는 여의주나 물고기를 문 용머리 4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석축 양쪽에는 다람쥐 모양의 조각이 배치돼 있다. 한쪽에는 올라가는 모습으로, 다른 쪽엔 내려가는 모습으로 꽃 한 송이와 함께 조각했다. 동쪽 계단으로 오르고, 서쪽으로 내려올 것을 안내하고 있는 표식이다.

뒤편의 사당에는 중앙에 김굉필의 위패, 동쪽에 정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내부의 양 측면 벽에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와 '설로장송(雪路長松)'의 벽화가 있어 눈길을 끈다.

도동서원의 아름다운 담장도 특별하다. 서원의 각 공간은 외곽을 감싸는 담장을 통해 구분되며, 담장에 설치된 문을 통해 연결된다. 담장은 와편 담장과 토석 담장 두 가지 형태다. 와편 담장은 진흙과 기와를 한 겹씩 쌓아 올린 것으로, 음양의 조화와 장식 효과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암막새와 수막새를 사용했다.

도동서원의 중정당·사당·담장은 1963년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

◆제례를 위한 특별 장치들

도동서원에는 제향(祭享)을 비롯한 예법을 위한 건축적 장치들이 특히 두드러진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정구가 영남학파 최고 예학자였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수월루 앞의 계단을 비롯해 환주문 앞의 계단, 환주문과 강당 사이에 놓인 좁고 긴 포장로, 사당 입구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등 이 모두가 아주 정성스럽게 가공된 석재로 만들어지고, 폭이 모두 65~70㎝ 로 매우 좁다. 위계질서가 철저한 예법을 일상적 이동에도 적용되도록 한 것이다. 가장 원로가 앞에 서고 서열에 따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좁은 통로와 계단을 따라 일렬로 오르도록 계획한 장치다. 사당 아래 마당에 있는, 정사각형 판석인 생단(牲壇)도 눈길을 끈다. '생(牲)'이란 제수로 쓰는 소나 돼지·염소 같은 짐승을 말한다. 생단은 제사 전날 이곳에 생을 놀려놓고 제관들이 품질을 검사하는 곳이다. 강당 앞 중앙에는 정료대(庭寮臺)가 서 있다. 긴 돌기둥 위에 사각형 상석을 설치한 구조다.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 놓고 밤에 불을 밝히는 장치다. 야간에 행하는 제례 때 사용됐다. 일반적으로 정료대는 사당 앞에 있다. 도동서원 사당 앞에는 석등이 놓여 있다.

또한 특이하게 사당 동쪽 담장에 감(坎)라고 하는 정사각형 구멍이 있다. 이는 제사 때 사용한 축문을 태워버리는 곳이다. 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쪽으로 수키와를 끼워 굴뚝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담장을 특별히 더 두껍게 쌓았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