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장려상-진보적 선비문화의 중심, 무성서원

관리자 2020.12.21 14:07 조회 937
한국의 서원 온라인 콘텐츠 공모전 수기 부문 당선작


상격 : 장려상

접수번호 : CIP08010042
성명 : 송O호



제목 : 진보적 선비문화의 중심, 무성서원


작년(2019)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대부분이 이전에 개인적으로 가본 곳이지만, 나는 서원이 이렇게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제대로 알고 다시 한번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리 개별 서원들과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고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원의 건물적 배치나 기능적 역할은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고 단순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서원은 별로 볼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나는 개별 서원에 대하여 미리 알고 본다면 각각의 서원에 많은 차이가 존재하고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방문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서원은 설립 배경과 그 안에 모신 배향자에 대한 사전 이해가 매우 중요하고, 특히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홉 서원들 중 특히 나에게 가장 색다르게 다가온 곳은 정읍의 무성서원이었다. 무성서원은 19세기 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아니한 전라북도 내 유일한 서원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을 비롯하여, 상춘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 선생 등 정읍 지역에서 성리학을 보급하고 학문을 장려한 7분을 배향하고 있다. 무성서원은 신라말(886) 이곳의 옛지명인 태산의 태수로 부임하여 8년간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을 세운데서 유래하였다.

무성서원은 여타 서원들과 다른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리적 위치이다. 무성서원은 자연 경관 속에 입지한 다른 서원들과는 다르게 일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의 삶과 유리되지 않고 그들의 희로애락을 공감한다는 설립 취지가 느껴졌다. 나에게 무성서원의 첫 이미지는 뭔가 넘을 수 없는 위엄이 있는 마을의 어르신이 거하는 유서 깊은 집안의 종택같은 느낌이었다. 그 집은 동네사람들의 생활을 살피고, 일이 생기면 그들의 생각과 말도 들어줄 줄 아는, 어른으로서 의견을 제시하고 결정하고 그들을 인도하는 그런 존경받는 어르신이 계신 곳이다.

제목에서 나는 무성서원을 진보적 선비문화의 중심이라고 표현했다. ‘선비하면 떠오르는 보수적인 이미지에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향자 최치원의 생애, 정읍이라는 지역, 그리고 선비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덕목에 주목해야 한다. 고운 최치원은 통일신라시대 말 사회구조의 부조리에 항거한 진보적 성향의 학자였고, 정읍은 관리의 폭정에 항거하고 인간으로서 주체적 가치를 주창한 동학혁명의 주된 발원지였다. 무성서원은 시대적 아픔과 백성들의 삶을 절대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무성서원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항거하여 면암 최익현을 중심으로 호남 최초의 의병을 창의한 중요한 현장이었고, 향약(鄕約)의 본래 취지를 제대로 간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동향약을 시행하였다.

무성서원 입구의 누각 이름은 현가루(絃歌樓)라고 하며 공자가 말한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꾸준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 서원 문화를 보이는 것과 편향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과 철학을 이해하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마음으로 다가설 때 현재 당면하고 있는 코로나 위기 등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무성서원 방문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의 의미를 마음속 깊이 깨달은 성찰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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