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정읍 무성서원] 통일신라시대 대학자 최치원의 치적과 학덕 기려

관리자 2022.06.15 17:04 조회 15
한국 세계문화유산 중 유일하게 마을 한 가운데 자리
태산사·생사당·향학당 합쳐 태산서원…이후 무성서원
구한말 최익현·임병찬 등 중심 항일 의병 활동 거점지

정읍 무성서원은 통일신라시대 선정을 베풀었던 최치원 선생의 치적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빠르다. 시간은 줄달음쳐 벌써 6월을 지나 중순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일상에 묻혀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간과한다. 두꺼운 얼음이 사르르 녹아가듯, 단단한 비누가 시나브로 녹아지듯 그렇게 지나간다.

시간의 쳇바퀴는 정신을 무화시킨다. 사유와 궁구(窮究)와 같은 일은 안중에도 없다.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한다. 한사코 여백과 여유와 숨 쉴 틈마저 빼앗아버린다. 4차 산업혁명, 기술문명, 디지털 모바일 세상은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라고 채근하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잠시 멈춰야 한다. 멈추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다.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은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우리 삶이 아무리 속도의 물살에 휘말리고 실적이라는 기계에 계수될지언정 중심을 잡아야 한다. 흔들릴 수 있으나 균형을 끝내 버려서는 안 된다. 균형의 소실점을 잃는 순간 난파하는 배처럼 그 요동을 감당할 수가 없다. 내부는 물론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충격에 허물어지기 쉽다.

서원은 정신을 고양하는 곳이다. 한쪽으로 엇나가려는 방향의 추를 가운데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곳이다. 정신의 중용은 물론 인식의 중용도 필요하다. 중용의 덕은 가변한 틈새 속에서도 중심을 끌어안는 힘인 것이다.

무성서원 누각 현가루

서원은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역류해 들어가, 미래라는 시간 속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담보한다. 바로 오늘이 중용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의 가운데 점에서 변화와 포용을 수용할 수 있다.

정읍 무성서원(武城書院) 가는 길. 날씨가 다소 흐리다. 장마철은 아직 멀었지만 차라리 비가 쏟아졌으면 싶다. 올 봄에는 비 소식이 없어 농민들이 애가 탔다.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일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이래저래 농심만 아프다. 농자재값은 올라가고 일손은 부족하고 날씨마저 부조하지 않으니 힘들 수밖에.

정읍에 갈 때면 농민들의 마음이 아슴하게 떠오른다. 농민혁명의 고장, ‘농자지천하지대본’의 정신이 들녘마다 서려 있는 고장이다. 그런 귀한 사상이 알차게 영글어 있는 지역이어서 오갈 때면 농사를 짓는 이의 바램을 숙고하게 된다. 무성서원 가는 길은 더불어 그런 농심을 조금이나마 헤아리는 여정이다.

무성서원은 여느 서원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풍경이 다르다. 서원이 자리한 곳이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다. 마을을 둘러싼 곳에 서원이 자리한다. 차라리 좋다. 학문을 한다며 외진 산속에 박혀 있거나, 발길이 쉬이 잡히지 않는 허허로운 들판에 자리한다면 외려 돌올한 인상을 줄 것 같다.

풍광이 뛰어나지 않아 배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서원 자체를 본다. 속 깊게 배어든 정신의 무늬를 보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9곳 중 유일하게 마을 가운데 자리 잡은 데다, 배향한 인물이 조선의 시간을 초월한 통일신라시대에 닿아 있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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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 기록이 담긴 ‘병오창의기적비’.

이곳은 고운(孤雲) 최치원(857~?)을 모신 서원이다. 당시 선정을 베푼 고운 선생의 치적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최치원은 당시 지금의 태산(지금의 태인) 태수로 부임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 물론 서원의 건립은 1615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기록에 따르면 무성서원의 기원은 최치원이 태산 태수로 있을 때 지은 생사당이다. 이후 1483년 정극인이 중심이 돼 건립한 향학당의 자리로 옮긴 후 옛 지명을 따라 태산사라 명명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러다 조선시대 지역 유림들이 태산사와 생사당, 향학당을 합쳐 태산서원으로 명했다. 이후 숙종 22년(1696년) 왕이 무성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는 내용이다.

사실 무성(武城)이라는 말에는 거칠고 무람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무성은 신라시대 태인의 지명이면서 한편으로 공자의 제자 자유와 연관된 에피소드가 결부되는 말이다. 『한국의 서원유산 1’』에는 논어 ‘양화’(陽貨) 편의 다음 내용이 소개돼 있다. 이른바 현가지성(絃歌之聲)의 고사다.

“자유가 노나라 무성의 현감이 되었는데, 한 날은 선생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라고 말씀하셨다.(이에 무성의 수령으로 있는) 자유가 대답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군자가 예악을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이 예악을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대들이여 자유의 말이 옳다. 앞에서 한 말은 농담이었다.”(김희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미술문화, 2019)

즉, 자유가 무성이라는 곳에 부임해 예악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평안했다는 내용이다. 공자가 때마침 그곳을 방문할 때도 청아한 현악기 소리가 들려왔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제 보니 서원 문루의 명칭이 현가루(絃歌樓)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에서 바라본 현가루.

언급한 대로 최치원은 통일신라시대 선비이지만 이곳에 배향된 것은 그의 선정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우리나라 최초 유학자로 불리는 최치원의 학덕을 본받기 위해 무성서원을 찾았고 그에 대한 시문을 남겼다. 이곳 문화해설사는 “선비들이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하고 한편으로 그와 관련된 시문 ‘계원필경집’을 보관하는 것을 적잖은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외삼문 담장 주변에 이곳을 거쳤던 현감들의 선정비를 비롯해 서원과 연관된 비석들이 있다. 특히 서원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많은 비각들이다. 그만큼 서원과 마을이 유교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연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무성서원은 구한말 항일 의병의 활동 거점지이기도 했다. 병오년 최익현과 임병찬이 이곳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병오창의기적비’는 서원이 강학 외에도 시대 상황에 의연히 맞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다.

무성서원의 건축적 특징은 누각인 현가루와 강당인 명륜당, 제향공간인 태산사가 일직선을 이룬다는 데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와 구성을 따른다. 일정한 공간을 따라 늘어선 건물의 구조는 단조로우면서도 호젓하다.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글·사진=박성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