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한국의 서원] 제자들의 존경과 정성… 그 위에 세운 講學(강학)의 중심

관리자 2022.06.15 17:10 조회 8

달성군 도동서원


도학의 정통성 계승한 한훤당 김굉필 기리는 서원

성리학 구축 업적…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조선 5현’
제자들, 중정당 받치는 기단석 돌 모아 다듬어… “스승 추모”


황토·암키와 쌓고 수막새로 장식한 담장, 전국 최초 보물로 지정
중정당·강학공간 등 공간배치 가장 엄격하게 지킨 전통서원 꼽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수현(首賢)인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607년 선조가 도동서원이란 이름으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수현(首賢)인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607년 선조가 도동서원이란 이름으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기와가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단단하게 쌓인 서원의 담장은 중정당, 사당과 함께 보물 350호로 지정돼 있다.

기와가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단단하게 쌓인 서원의 담장은 중정당, 사당과 함께

보물 350호로 지정돼 있다.


대구시 달성군 현풍 대니산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서원은 사람이 살기 좋도록 산등이 양쪽으로 내리며 바람을 막아 주고, 앞 가까이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자리에 서 있다.


글=박영민/사진=주상현 기자


김굉필의 외증손자 한강 정구가 심은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이 넘은 것으로 둘레가 장정 6명이 감쌀 정도다.

김굉필의 외증손자 한강 정구가 심은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이 넘은 것으로 둘레가

장정 6명이 감쌀 정도다.


‘도(道)가 (중국에서) 동쪽(조선)으로 왔다’라는 뜻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은 김굉필(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달성군 현풍 비슬산 기슭에 있던 ‘쌍계서원’이 정유재란 때 불타자 1604년 김굉필의 외증손자 한강 정구가 앞장서 지금의 대니산 기슭에 다시 세우고 이름을 ‘보로동서원’으로 지었다. 그 뒤 1607년 선조가 ‘도동’이란 사액을 내림으로써 지금의 ‘도동서원’이 됐다.

한훤당 김굉필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조선의 학자다. 김굉필은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하에서 붕당을 결성했다는 죄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전남 순천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 그 후 1506년 중종반정 뒤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됐으며 광해군 2년(1610)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받들어진 ‘조선 5현’ 가운데 김굉필은 그 으뜸인 ‘수현(首賢)’으로 모셔졌다.

도동서원에 오면 처음 만나는 것이 주차장 옆 거대한 은행나무다. 김굉필의 외증손자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을 세우면서 심었다고 알려진 나무로 수령이 400년이 넘을뿐더러 둘레가 장정 6명이 팔을 이어야 할 정도다. ‘김굉필 나무’라고 불리는 은행나무는 오랜 풍상을 견뎌 오면서 이곳저곳 버팀대를 받쳐 놓았지만, 나무의 기상은 당당하고 장엄함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초록빛을 띠는 은행잎 사이로 단청이 고운 ‘수월루(水月樓)’가 방문객을 맞는다. 높은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입고 있는 오색단청이 화려하다. 수월루는 처음 도동서원이 들어설 때는 없었다고 한다. 1849년에 창건된 후 1888년에 소실됐다가 1974년에 중건됐다. 수월루 뒤 계단을 오르면 강학공간으로 들어가는 환주문이다. 문은 허리를 공손히 굽혀 마음을 추스르며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게 높이가 낮다. 지금은 외삼문인 수월루가 정문으로 있지만, 창건 당시에는 이 환주문이 정문이었다고 한다. 환주(喚主)는 ‘내 심성의 주(主)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喚)’는 뜻이다.

환주문을 들어서면 선비들이 공부하는 강당인 중정당과 기숙사 역할을 한 동재와 서재, 그리고 장판각이 있는 강학공간이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전통서원의 공간배치 형식을 가장 엄격하게 지켜 만든 서원으로 한국 서원의 공간배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입공간·강학공간·제향공간의 3개 영역으로 나뉘는 도동서원은 외삼문과 수월루가 진입공간에 해당하고, 강학공간엔 중정당 및 동재와 서재, 장판각 등이 있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이 있다. 이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의 모습이다.


중정당 기단에 쌓여 있는 12조각석. 이 기단석은 전국에서 김굉필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보내온 돌 중 하나다.

중정당 기단에 쌓여 있는 12조각석. 이 기단석은 전국에서 김굉필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보내온 돌 중 하나다.


강학의 중심지 중정당으로

중정당(中正堂)은 좌우가 넓은 가로 장방형 뜰 한가운데 적당한 크기의 돌판들이 잔디밭에 길게 놓여 있고, 그 정면 높은 축대 위에 장엄하게 앉아 있다. 강학 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중정당은 양쪽으로 2개의 돌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다. 어른 키 높이의 기단 위에 자리한 중정당은 화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보이지만 위세만은 엄하다. 보물 350호로 사당과 더불어 도동서원의 중심 건축물인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골기와집이다. 중정당 마루 양쪽엔 온돌방이 한 칸씩 있다. 정면을 향해 마루의 왼쪽 방은 원장, 오른쪽 방은 스승이 지내던 방이라고 한다. 가운데 3칸의 훤하게 열린 대청마루는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토론하던 곳이다. 이곳 벽면에는 도동서원 사액현판과 임금의 전교, 백록동규, 서원규목 등의 목판들이 색이 바랜 채 걸려 있다.

중정당에 걸린 ‘도동서원’ 편액은 2개다. 강당 앞 처마 밑의 칠 없는 목판의 검은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를 뽑아서 새긴 것이고, 강당 안쪽 ‘중정당’ 위에 있는 검은 바탕의 흰 글씨는 선조의 사액현판으로 경상도 도사 배대유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도동서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정당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이다. 1604년 사당 건립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에 있는 김굉필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저마다 마음에 드는 돌을 모아 와서 쌓았다고 한다. 그러니 모양과 크기는 물론 색깔이나 돌의 재질도 저마다 다르다. 4각형, 6각형, 심지어 12각형으로 다듬은 이 돌들이 서로 섞여 틈새 없이 짝을 맺어 맞물리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단에 쌓여 있는 것은 돌이 아니라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지극한 정성과 빼어난 예술적 솜씨가 결합돼 쌓여 있는 것”이라는 송은석 해설사의 말에서 그 의미를 새겨 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중정당 석조기단에는 용머리를 비롯해 동입서출(東入西出)을 뜻하는 다람쥐를 닮은 작은 동물과 꽃송이 문양이 함께 조각돼 있다. 용머리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아 서원을 보호해 주는 한편, 용이 하늘로 오르듯 이곳에서 학문을 닦은 선비들이 과거 급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도동서원의 건물 배치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건물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서원 강당 건물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양옆 동쪽과 서쪽에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를 거느린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을 바라보다 보니 북향이다. 따라서 중정당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면 왼쪽이 서쪽이요, 오른쪽이 동쪽이다. 하지만 도동서원은 자기가 소우주의 중심이 돼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서원 중심으로 재해석했다. 즉, 중정당에서 볼 때 왼쪽(서쪽) 동재를 거인재, 오른쪽(동쪽) 서재를 거의재라 이름 붙였다. 지리학적 방위와 다르게 동재와 서재의 방향이 서로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기단 오른쪽의 위로 오르는 모습의 다람쥐 조형물. 이는 유교시설물의 일반적 출입규칙인 동입서출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기단 오른쪽의 위로 오르는 모습의 다람쥐 조형물. 이는 유교시설물의 일반적 출입규칙인

동입서출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을 오르며

중정당의 뒤로 뻗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이곳 도동서원의 가장 깊은 안쪽, 가장 높은 곳에 사당(祠堂)이 있다.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다. 주변은 담장을 쌓아 독립된 신성한 제사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다른 서원과 달리 이곳 사당에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다. 사당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정면 가운데에 한훤당 김굉필의 위패(位牌)가, 오른쪽에는 한강 정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좌우 벽에는 벽화가 있다. 창건 당시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 이 벽화는 김굉필의 시 ‘선상(船上)’과 ‘노방송(路傍松)’을 그린 것이다. 아쉽게도 그림에 낙관이 없어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다.

중정당에서 사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사당을 출입하는 문과 연결돼 있는데, 특이하게 출입문은 3개인데 계단은 2개뿐이다. 도동서원 사당은 동입동출(東入東出)이다. 사당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도 동쪽 문으로 나온다. 그래서 내삼문 밑에는 2개의 계단이 있고 왼쪽 문에는 오르내릴 계단이 없다. 오른쪽 짧은 계단과 문은 제례를 집행하는 제관이 다니는 곳이다. 한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이다.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면 안 된다. 위패를 모시거나 제물을 옮길 때 문을 연다.

한편 사당 옆 담장이 사각형으로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제사가 끝난 다음 제문을 태우는 감(坎)으로 다른 서원에서는 땅에 구덩이를 파서 묻는 예감인데 반해 벽감으로 돼 있는 것이 특이하다.

도동서원에서 감상하는 것 중에 담장을 빼놓을 수 없다. 담장은 중정당과 사당을 포함해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담장은 암키와와 수막새를 이용해 음양의 조화와 장식 효과를 연출한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담장 가장 아랫부분은 진흙을 섞어 막돌을 두세 층 쌓았다. 그리고 위에 황토와 암키와를 번갈아 가며 층으로 줄 바르게 쌓고 그 위에 다시 기와로 지붕을 얹어 마무리했다. 황토와 암키와 사이사이에는 가로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어 모양을 내고 있는데, 황토와 암키와의 단조로운 배치에 둥근 모양의 수막새가 들어가 장식적으로 아름다운 토담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서원의 부속 건물로 증반소, 전사청 등이 있다. 증반소는 사당 우측에 있으며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곳이며, 전사청은 서원 바깥에 설치돼 문표, 제향과 제물을 받아 보던 일을 하는 곳이다.

도동서원은 한 해에 네 번은 찾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봄엔 사당 앞 내삼문 아래 모란꽃이, 여름 석 달 동안은 배롱나무꽃이 방문객을 기다린다. 가을에는 금빛 은행나무, 겨울에는 흰 눈 쌓인 서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서원을 찾았을 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라 어느 것 하나 볼 수 없었다.

취재 협조=도동서원

출처=박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