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 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 행 : 김진수 기자
■ 2023년 8월 24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여행스케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방송 다시 듣기는 BBS청주불교방송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김진수 :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주말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나와계시죠? 안녕하십니까.
▷김선권 :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김진수 : 작가님 오늘은 어디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김선권 : 오늘은 안동병산서원으로 가보겠습니다. 제가 전에 ‘한국의 서원’이란 타이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논산돈암서원과 영주소수서원에 대해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는데, 오늘 소개해 드릴 안동병산서원도 돈암서원, 소수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김진수 : 서원들이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교육기관이니까 당연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다른 점도 있겠죠? 그리고 언급해 주신 서원들을 들어보니까 특히 경북지역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선권 :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원래 많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안동지역은 퇴계 이황 이래로 그의 제자들이 영남학파를 주도하였고 그로 인해 서원의 설립이 많았습니다. 서원의 수가 많아지면서 서원의 질적 저하가 가속화되자 영조 17년에 훼철령으로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가 정조 때에 복설과 신설 등으로 다시 늘어났는데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단호한 훼철령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어서, 영남은 13개소만 남게 되었습니다. 서원은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발전적인 의미로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정치권과의 연계와 신분유지기구로 그 기능이 변화되면서, 18~19세기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김진수 :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무리 영남지역이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 인근이 인구가 많아서 서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중에 하나도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김선권 : 그건 다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서원 철폐령을 내렸던 게 대원군이잖아요. 그런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는 서원의 타락 외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었습니다.
▶김진수 : 정치적인 의도라면요?
▷김선권 : 대원군은 노론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론의 근거지가 서울, 경기 지역이었습니다. 대원군이 등용했던 남인의 근거지가 영남지역이었죠. 이런 이유로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서원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김진수 : 그렇군요. 서원의 존립에도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있었네요.
▷김선권 :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보통 서당과 성균관을 이야기합니다. 성균관은 현재의 대학에 해당하는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이고 서당은 초등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서원과 향교는 지금의 중등 교육기관에 해당합니다. 더불어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 기능도 같이했습니다. 그래서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김진수 : 향교와 서원이 지금의 중등 교육기관에 해당한다고 하셨는데, 향교와 서원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김선권 : 향교는 관학으로써 지금의 공립학교에 해당하고, 서원은 사학으로써 지금의 사립학교에 해당합니다. 향교는 공자와 그 제자들인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서원은 자신의 선생님인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냅니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강학 기반을 배경으로 건립된 서원입니다. 당연히 서애 유성룡에 대한 제사를 지냅니다. 향교의 학생은 교생, 서원의 학생은 원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초기의 향교 입학 조건은 16세 이상 40세 미만의 평민 이상의 자제들이었는데 추천과 시험을 통해 입학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학생들이 대다수 양반이었으나, 사림이 집권한 16세기 이후 양반의 자제들이 대부분 서원으로 가게 되면서, 향교의 학생 대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이 있어 이를 위해 입학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김진수 : 현재의 대학생 군입대 연기와 비슷한 것인가요?
▷김선권 : 조금 다릅니다. 현재는 면제가 아니라 연기인데, 향교에 다니는 교생은 그 시기에 해당하는 군역이 면제되었습니다. 물론 향교에 다니다가 그만두면 다시 군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진수 : 그렇다면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향교에 다니는 척하는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선권 : 네, 그런 생각하기 쉽긴 한데요. 그래서 국가가 일종의 중간고사 기말고사 같은 시험을 봐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제적시켰습니다. 조선이란 나라가 생각보다 체계가 잘 잡힌 나라였습니다. 서두가 좀 길었습니다. 이제 병산서원으로 가볼게요.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 줄기를 따라 좁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고요히 숨어있는 서원, 병산서원과 마주하게 됩니다. 보통 서원에 가면 가장 먼저 홍살문과 마주하게 되는데 홍살문은 기둥만 있고 붉은칠을 한 나무로 된 문인데요. 신성시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균관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묘 밖에 홍살문을 세웠습니다. 홍살문은 그 경역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말과 행동을 삼가고 경건한 마음으로 진입하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그런데 병산서원에는 이런 홍살문이 없습니다.
▷김진수 :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김선권 : 저도 궁금해서 알아보긴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알아낸 것은 경북지역의 서원에는 홍살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안동지역에 있는 도산서원과 호계서원에도 홍살문이 없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경주 옥산서원에도 역시 홍살문이 없었습니다.
▷김진수 : 매우 특이한 것 같습니다. 경상북도의 서원만 그렇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다음에 이유를 발견하시면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김선권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병산서원은 요즘 배롱나무꽃 천지입니다.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꽃에 황홀경을 느낄 지경입니다. 배롱나무꽃은 100일 동안 붉게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해에 세 차례에 걸쳐 만개합니다. 지금 두 번 만개한 상황이니까 당분간은 배롱나무꽃과 어우러진 병산서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롱나무는 예로부터 선비, 유학자들이 서원 혹은 향교에 심었고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던 꽃나무입니다. 이 나무를 심는 데는 그 이유가, 1년에 한 번씩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배롱나무처럼 정진을 거듭해 심신을 수련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김진수 : 배롱나무와 백일홍이 같은 나무였군요. 많이 들어보긴 했는데 같은 나무인줄은 몰랐고,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김선권 : 네. 입구부터 화사한 배롱나무꽃에 빼앗긴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외삼문인 복례문으로 들어섭니다. 나지막한 솟을삼문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이다’라는 복례의 의미을 새기고 들어서면 그 유명한 만대루와 마주하게 됩니다. 만대루는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규모의 아주 큰 망루입니다.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기둥들과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의 모습이 건축물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만대루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구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병산의 자연경관이 참 아름다웠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로 출입이 금지되어 특별한 행사가 열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올라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진수 : 병산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던 만대루에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시니,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김선권 : 그런데 아쉬워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우다’라는 의미가 있는 서원의 강당,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만대루의 기둥과 기둥 사이로 강이 흐르고, 병산의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집니다. 입교당은 향교에서는 명륜당이라고 부르는 교육 공간인데, 입교당 양쪽으로 있는 건물은 유생들의 기숙사인 서재와 동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전통적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중요시했습니다. 궁궐 안 세자가 머무는 곳은 궁궐의 동쪽에 위치하고 동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자를 동궁마마라고 했었지요. 좌의정과 우의정은 품계는 같지만, 항상 남쪽을 바라보고 있던 임금의 기준으로 볼 때 좌측이 동쪽인데, 동쪽에 있는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내부서열이 높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통 동재에는 선임 유생들이, 서재에는 신참 유생들이 머물렀습니다. 이를 ‘좌측은 높고 우측은 낮다’하여,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라고도 했습니다.
▷김진수 : 곳곳에 디테일이 숨어있군요.
▶김선권 : 네. 그렇습니다. 병산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뒤쪽으로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존덕사가 있습니다. 존덕사는 향교에서는 대성전이라고 부르는 공간인데, “학문과 덕행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에서 존덕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존덕사로 들어가는 내삼문(內三門)인 신문(神門) 기둥에 주역의 8괘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다른 향교나 서원에서는 볼 수 없은 병산서원만의 특징입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의 일생과 그 시기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주역의 괘로 풀어서 새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김진수 : 알겠습니다. 오늘 작가님 안동병산서원 전해주셨습니다. 작가님 저희가 보통 음식 소개까지 해주시는데, 시간 관계상 여기까지 전해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선권 : 네. 고맙습니다.
▷김진수 : 지금까지 여행작가 김선권 작가와 여러분 함께 하셨습니다.
출처: 김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