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의 개요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인후(1510~1560). 그는‘대학’을 1000번 넘게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대학’을 버리고서는 ‘도(道)’에 이를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대학’을 읽지 않고 다른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치 터를 닦지 않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필암서원 전경
호남학맥의 본산인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은, 1590년 호남의 유학자들이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필암서원은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고르고 편편한 땅에 앉아 있습니다. ‘홍살문’과 ‘하마석’, 그리고 나이 많은 은행나무를 지나면 정문인 ‘확연루’가 있습니다. ‘확연(廓然)’에는 ‘김인후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유식공간‘확연루’를 지나면 강당인‘청절당’입니다. 청렴결백한 절개를 지켜 벼슬길을 끊은 그의 정신이 살아있습니다.
‘청절당’뒤로 ‘진덕재’와 ‘숭의재’가 동・서쪽으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 왼쪽 위에 ‘경장각’이 있습니다. ‘왕과 조상의 유물을 공경해 소장하라’라는 뜻을 담은 ‘경장각’ 현판은 정조가 손수 썼습니다. 팔작지붕 아래 네모서리에 3마리의 용머리가 돋보입니다. 임금이 내린 유물이 간직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34세 때 김인후는, 뒷날 인종 임금이 되는 세자를 가르쳤습니다. 이때 세자는 김인후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사서 대나무 그림 ‘묵죽도’ 한 폭을 손수 그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묵죽도’를 ‘경장각’에 소중하게 보관했습니다. 김인후의 후손들이 묵죽도 원본을 기증하여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오른쪽 내삼문을 들어가면 제향공간 ‘우동사’가 있습니다.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에 태어난 김인후 선생이다’라는 뜻의 ‘우동사’에는 김인후를 북쪽 가운데, 그 동쪽에 사위인 양자징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필암서원은 이렇듯 강당과 동・서재가 모두 북쪽의 사당을 공손히 바라보며, 선현에 대한 예를 담은 평지 서원의 대표적인 구조입니다. 그리고 ‘우동사’의 흙담 동쪽 밖에는 유생들이 배우는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습니다. 강학공간, 제향공간, 부대시설이 엄격하게 담장으로 나눠져있으나, 크고 작은 문을 통해 편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장판각
경장각
일본군에 저항한 전라도 사림의 의병활동 중심지였던 필암서원은, 정유재란 때 불타서 1624년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세웠습니다. 1659년 지역 유생들이 사액을 바라는 상소를 올리자, 효종이 ‘필암서원’이라고 직접 쓴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이름을 ‘필암(筆巖)’이라 지은 것은 그의 고향마을 앞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1672년에 현재의 자리에 다시 옮겨지었습니다.
한편 장성군은 ‘서원스테이 운영’, ‘서원 기록 전시공간 마련’ ‘전통체험’ 등을 통해 필암서원의 선비문화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필암서원의 제향
필암서원에서는 헌관과 집사가 향사 전날 강당에 모여서, 저마다 평소 즐기던 문장을 돌아가면서 낭독하는 ‘강회’를 가집니다. 그리고 향사일에는 시제에 따라 저마다 시를 지어 발표 합니다. 선현에 대한 존경과 가르침을 이 시대에 다시 일깨우기 위해 필암서원에서만 치르는 행사입니다. 그리고 향례 때 주향위에만 축문을 읽는 다른 서원과 달리, 주향위와 배향위에도 각각 축문을 읽습니다. 제관들은 향사를 마친 뒤에 강당에 모여서,‘백록동학규’를 돌아가며 읽습니다.
제향 인물
는 고고한 절의와 깨끗한 인품을 지닌 도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 여겨졌습니다. 열여덟에 ‘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항아리 같다’라는 칭찬을 들었던 그는 스물둘에 ‘사마시’에 들어, 서른하나에 ‘문과’에 올랐습니다. 세자가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되어 어진 정치로 나라를 보다 안정시키려 했으나, 인종이 여덟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서 성리학을 파고들며 지냈습니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의학 등 여러 학문에 밝았습니다. 성균관에서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습니다. ‘소쇄원사십팔영’ 등 1600수 넘는 시도 남겼습니다. 호남 성리학 발전의 기반을 다진 학자로, 성균관 문묘에 모신 우리나라의 뛰어난 유학자 ‘18현’ 가운데 한 분입니다.
양자징(1523~1594)은 어렸을 때부터‘소학’을 배우고 익혀서 실천하였습니다. 15세에는 ‘경서’와 ‘사기’에 막힘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황, 이이 등에게 배웠습니다. 선조 때 거창 현감, 석성 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김인후의 사위이자 제자였습니다.
필암서원의 강학
필암서원에는 중앙과 지방에서 수많은 인사들이 찾아와 학문을 토론했습니다. 서원에서 갈무리하고 있는 갖가지 현판과 기문 등은, 끊이지 않고 찾아든 지식인들의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이런 자료들은 필암서원이 장성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학문적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합니다.
다달이 초하루와 보름에는 ‘청절당’에서 강회를 열었습니다. 우수자에게는 종이를 상으로 내렸습니다.
필암서원의 교류 및 유식
필암서원은 평지에 세웠기 때문에 다른 건물에서는 바깥 경관을 바라보기 어렵고, 높은 ‘확연루’에서만 서원 앞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방이 막혀있는 강학공간에서 삼매에 빠진 듯 서책에 묻혀 지내던 유생들이, 이곳 ‘확연루’에 올라 가슴 확 트이는 여유를 누렸을 것입니다. 끝이 없는 학문은 때론 고통이었지만, 그때마다 유식공간은 위안과 치유였는지 모릅니다.
확연루
문화재 & 기념물
필암서원에는 서원의 임원, 원생, 노비, 서원의 역대 원장들 명단과 서원의 재산 등을 적어놓은 문서들이 남아있습니다. 모두 15책 65장인 이 문서들은 ‘필암서원문적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587호입니다. 특히 노비의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는 국내 하나밖에 없는 노비족보로서 노비의 출신, 가족관계 등이 담겨 있습니다. .
‘장판각’에는 ‘하서전집’649판, ‘초서천자문’18판, ‘해자무이구곡’18판, ‘백련초해’13판 등 목판 700여 매를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당인 ‘우동사’에는 제향인물의 사상을 담은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그 인품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필암서원 문적일괄(보물 제587호, 출처 문화재청)
필암서원 하서선생 문집목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5호, 출처 문화재청)
필암서원 하서유묵 목판 일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16호,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