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의 개요
현풍에서 낙동강 따라 동쪽으로 대니산 넘어가는 중턱의 ‘다람재’에 올라서면, 산 아래 저만치‘도동서원’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내려다’볼 수밖에 없어, 송구스런 마음으로 고개 숙인 채 꼬불꼬불 내려갑니다. 아니,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도동서원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나 마음 추스르며 ‘올라가는’ 길입니다.
도동서원 전경
도동서원은 대구 달성 대니산 기슭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앉아있습니다. 산등이 양쪽으로 갈라 내리며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 넉넉한 물이 흐르는 명당입니다. 서원 앞엔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기다립니다. 무성한 잎 세찬 기운으로 하늘을 받들고, 밑동은 어른 여섯이 두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습니다. 서원을 세운 정구가 이 은행나무를 심었습니다. 마음속에 귀한 어른 모시듯, 서원 앞마당에 정성들여 이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도동서원’은 김굉필(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현풍 비슬산 기슭에 있던 ‘쌍계서원’이 정유재란 때 불타자, 1604년에 김굉필의 외증손자 정구가 앞장서 대니산 기슭에 다시 세우고 ‘보로동서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 1607년 선조가 ‘도동서원’이란 이름으로 현판을 내려서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외삼문 ‘수월루’는 높은 팔작지붕의 화려한 단청을 입고 있습니다. 수월루를 지나면 좁고 낮은 ‘환주문’입니다. ‘환주’는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문을 들어가기 앞서 ‘내 마음의 주인은 깨어있는가’라며 진솔하게 스스로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배움의 문에 들어서는 옛 선비들은 어딜 가나 이렇듯 ‘겉치레’보다 ‘속 가짐’이 달라야했습니다.
거인재
거의재
강당인 ‘중정당’은 디딤돌 일곱을 올라야 되는 어른 키높이의 기단 위에 앉아있습니다. 도동서원 심미적 디테일의 절정은 이 ‘중정당 기단’입니다.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을 서로 물고 물리도록 다듬어 쌓아, 마치 고운 조각보를 둘러친 듯합니다. 그 위의 민흘림기둥, 그 여섯 굵은 기둥 윗부분에 흰 종이띠가 각각 둘러져 있습니다. ‘상지’입니다. 도동서원에 모신 김굉필이 ‘동방오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가운데서 가장 웃어른임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먼 곳에서도 한눈에 알아보고 예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서원 가운데 도동서원에만 이 흰 띠가 둘러졌다고 합니다.
의로움이 사는 ‘거의재’와 인자함이 사는 ‘거인재’. 동·서쪽 두 공부방에는 매일 밤 깊도록 책 읽는 소리가 이어지느라 호롱불이 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에는 김굉필을 가운데, 그 왼쪽에 정구를 모셨습니다.
도동서원은 한 해 네 번은 찾아와야 제대로 보인다고 합니다. 봄엔 사당 앞 모란꽃이, 여름 석 달 동안은 배롱나무 붉은 꽃이 기다립니다. 가을엔 금빛 은행나무, 겨울엔 흰 눈 덮어쓴 골기와 아래 들어서서, 내 마음도 백설처럼 깨끗한지 겸허하게 한번 들여다봐야 합니다.
도동서원의 제향
도동서원 제향은 ‘음복례’를 엄격하게 진행합니다. 현재 서원향례의 기준이 되는 대표적 서원이 도동서원입니다. 홀기에 따라 진행하는 의식이 엄숙하고, 제관 모두가 돌아가며 잔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잔을 올리는 순서도 다른 서원과 다릅니다.
특히 향례를 마친 뒤 축문은, 사당 서쪽 담장의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을 내어 만든 ‘감’안에서 태웁니다. 다른 서원은 땅에 구덩이를 파서 ‘감’을 만듭니다. 한편 사당의 문이 낮아서, 제향공간에 들어서려면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제향에 대한 엄숙함과 공경함입니다.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제향 인물
은 스무 살 때 김종직을 찾아가서 소학을 배웠습니다. 김굉필의 ‘독소학’이라는 시에 ‘소학 책 속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네’라는 구절을 본 스승 김종직은, “성인이 될 근기”라며 남다르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동자’라 부르며 평생토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굉필은 늘 연밥 엮은 갓끈을 단 초립을 쓰고 지냈습니다. 밤낮없이 방안에 꼿꼿이 앉아 학문을 닦았습니다. 때문에 가족들은 밤이 깊어도 가끔씩 연밥 갓끈이 책상에 닿아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지켰다고 평가됩니다. 이황은 그를 ‘도학의 으뜸스승’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등이 있습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습니다.
함께 모신 (1543~1620)는 김굉필의 외증손자입니다. 17세기 이 나라 남동부지역 예학연구의 대표적 사림으로, 도동서원을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도동서원의 ‘원규’는 정구가 지었습니다.
도동서원의 강학
겨울과 봄에는 ‘오경’과 ‘사서’등 여러 성리학 서적을 읽고, 여름과 가을에는 역사책이나 문집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읽게 했습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후학양성에 정성을 쏟은 김굉필은 성리학이론 가운데 실천윤리를 강조했습니다. ‘시문 중심의 학문’을 버리고, 정몽주 이후로 끊어진 ‘의리의 학문’을 다시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중정당
장판각
도동서원의 교류 및 유식
도동서원 ‘수월루’의 ‘수월’은 ‘차가운 강물을 비추는 밝은 달’을 뜻합니다. 이 ‘강물 위 밝은 달’은 도동서원 선비들의 앞날을 밝혀주고, 선비들은 ‘수월루’에 올라 강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오르면, 옛 선비들의 꼿꼿한 기개가 마른 누마루에 체온처럼 배어있습니다.
수월루
도동서원 은행나무
문화재 & 기념물
‘중정당’기단 두 곳에 새겨진 ‘세호’, 앞마당에 매서운 눈빛으로 납작 엎드려있는 ‘돌거북’, 기단 정면 4곳에 솟아 있는 ‘용머리’, 사당을 오르는 돌계단의 ‘연꽃무늬’를 비롯해 서원 곳곳에는 독특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돌과 흙, 기와가 어우러져 단단하게 쌓인 ‘도동서원 담장’은 ‘중정당’, ‘사당’과 함께 보물(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중정당 · 사우 담장(보물 제3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