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서원의 개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정갈한 기운이 살갑게 맞이합니다.
‘어떤 곳에 서원을 세울 것인가’는 서원을 세울 때 매우 중요합니다. ‘남계서원’은 이에‘답을 하는’터에 앉아있습니다.
남계서원 전경
경남 함양에 있는‘남계서원’은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서원입니다. 정여창(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림이 뜻을 모아 1552년에 세웠습니다. 1566년 명종이 ‘남계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이 서원에 모시고 있는 정여창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김종직의 가르침 속에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성리학을 파고들었습니다. 세자 시절의 연산군을 가르치기도 한 정여창은, 유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인들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함경도로 유배되어 150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여창은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우리나라의 뛰어난 다섯 분의 유학자를 일컫는‘동방오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모셔졌습니다.
남계서원은 16세기 후반 일본의 침략에 맞선, 경남지역 의병활동의 터전이었습니다. 때문에 1595년에 일본군이 불태웠으나, 전쟁이 끝난 뒤 함양의 사림이 뜻을 모아 다시 세웠습니다. 남계천 맑은 물과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서원은, 연화산 기슭의 비탈진 터를 다져서 자리 잡았습니다. 강학공간은 앞에 두고, 제향공간은 그 뒤 높은 곳에 앉혀, 우리나라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구조를 처음으로 갖추었습니다. 때문에 그 뒤에 세워지는 많은 서원들은 이를 본받게 됩니다.
서원 어귀에 있는 ‘하마비’와 ‘홍살문’을 지나서 정문‘풍영루’에 오르면, 편액에 ‘사방으로 트인 전망, 넓은 들판, 감돌아 얽히듯 냇물이 흐른다. 먼 숲은 푸르고 저녁노을은 아름답다’라고 적혀있습니다.
‘풍영루’를 지나면, 양팔 벌린 듯 동·서쪽 두 곳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그 뒤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누마루‘애련헌’,‘영매헌’을 각각 하나로 이어서 앉아있습니다. 서원의 강학공간에 연꽃과 매화의 향이 그윽한 연못을 가까이 두고서 아담한 유식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서원건축에서는 드문 모습입니다. 그 뒤에 ‘남계서원’ 현판이‘남계’와‘서원’으로 나뉘어 걸려있는 강당, ‘명성당’이 있습니다. 그 동쪽에 사방이 나무판으로 벽을 이룬, 책과 목판을 보관하는‘경판각’이 있습니다. ‘명성당’과 ‘경판각’ 사이로 들어가면, 가파른 계단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사당’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향공간이 강학공간 뒤 높은 곳에 엄숙하게 모셔진 것은 남계서원이 처음입니다. 사당 앞에 ‘관세대’와 ‘정료대’가 놓여있습니다. ‘관세대’는 사당에 들어가기 앞서 손 씻을 대야를 놓는 곳이고, ‘정료대’는 밤에 관솔이나 기름 등을 태워 불을 밝히던 곳입니다.
연지
홍살문
남계서원의 제향
남계서원에서는 향사를 앞두고, 원장과 함양의 선비 30여 명이 모여서 제관을 선정합니다. 대부분의 서원 향사에서는, 밥을 하지 않고 생쌀과 기장을 제기에 담아 올립니다. 그런데 남계서원은 쌀과 기장으로 고두밥을 지어서 차립니다. 그리고 헌관이 잔을 올릴 때도 다릅니다. 모삿그릇에 술을 세 번 나누어 부은 뒤, 절을 두 번 올립니다. 제향이 끝나면 따로 ‘음복례’ 없이 곧바로 아침 밥상을 차립니다. 해마다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냅니다.
제향 인물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한 . “유학적 이상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권력의 도덕적 의지가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집권세력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1523~1567)과 (1569~1641)은 남계서원을 세우는 데 앞장섰고, 성리학의 교육과 실천을 널리 편 지역 대표적 사림입니다.
정온은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닦은 뒤,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 뒤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스스로 할복하는 선비의 매서운 절개와 의리를 보였습니다.
자결에 실패한 정온은 고향으로 내려와 세상을 등지고 지냈습니다. 강익은 정온의 외삼촌입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깊이 파고든 그를, 스승 조식은 “강익만큼은 분명히 믿는다”라며 그의 인품을 높이 샀습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가운데, 그 동쪽에 강익을 서쪽엔 정온을 모시고 있습니다.
남계서원의 강학
선비고을 함양은 예로부터 ‘글’과 ‘예의’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마을에는 예의범절이 뚜렷하고, 집집마다 자식을 가르쳐서 시경과 서경을 읽는다’고 알려졌습니다.
이곳 함양의 남계서원은 조식, 오건 등의 이름난 학자를 모셔다가 수시로 공부하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20~30명이 모이는 이 모임은 그 학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성리학의 핵심개념에 대한 갖가지 주장들이 쏟아졌습니다. 참석 인물 대다수가 ‘남명학파’의 학자들이었으므로 남명학이 지향하는 근본정신에 대해서도 뜨거운 토론을 벌였습니다.
명성당
경판각
남계서원의 교류 및 유식
선비들은 서원의 정문인 ‘풍영루’에 올라,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맑은 기운 속에서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고, 자연을 노래했습니다. 이렇듯 여유롭게 풍류를 즐기고, 학업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교류했습니다. 특히 강학공간의 동재와 서재에는 각각 ‘애련헌’‘영매헌’이라는 좁은 누마루가 이어져 있습니다. 원생들은 이 누마루 앞 연못의 연꽃과 매화 향기 속에서 문학과 예술,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문화재 & 기념물
남계서원은 1974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 2009년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66호인‘일두선생문지책판’, 경남 유형문화재 제167호인 ‘개암선생문집책판’등이 있습니다. ‘어정오경백편’, ‘남계서원경임안’, ‘부보록’등 59종 317책이 갈무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