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의 개요 음성 파일 (0:00)
“무릇 가르침은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된다. 사당을 세워 덕 높은 분을 받들고 서원을 지어 배움을 도탑게 해야 한다. 진실로 ‘교육’은 난리를 막고 굶주림을 구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다”
백운동서원을 세워 선현을 기리고 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주세붕의 주장이었습니다.
소수서원 전경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은 고려 말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순흥 출신의 성리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앞장서 세운 우리나라 첫 서원입니다. 안향(1243~1306)의 위패를 사당에 모시고 나서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유학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백운동서원은 이황이 1550년에 명종이 손수 쓴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아 이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들과, 노비도 내렸습니다. 서원의 이름인 ‘소수’는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서 닦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나라에서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소수서원에는 모두 네 분의 선현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땅에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그리고 그의 후손이자 순흥 안씨의 대표적 학자인 안축과 안보, 또 한분 주세붕입니다.
소수서원에 이르면 짙은 노송군락이 서원 앞에서 기다립니다. 선비들이 그 장엄한 기상을 닮길 바라며 심은 ‘학자수’라는 적송 숲입니다. 동쪽으로 ‘죽계’의 맑은 물이 감싸며 흐르는 수려한 곳에 소수서원이 아늑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서원 앞에 우뚝 서 있는 ‘당간지주’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본래 ‘숙수사’라는 절터였다고 합니다.
서원의 정문인 ‘지도문’ 동쪽에 유식공간 ‘경렴정’이 있습니다. 서원에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은 제향, 강학, 유식공간 등을 갖췄지만, 동쪽에 강학공간, 서쪽에 제향공간을 두었습니다.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앞뒤로 배치하는 틀에 박힌 서원의 배치 구조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 전통의 예를 따른 것입니다.
원생들이 기숙하던 동・서재는 명륜당 북쪽에 동서로 ‘일신재’와 ‘직방재’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동쪽에 ‘지락재’, ‘학구재’가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쪽에 단아한 담장을 두르고 남쪽으로 앉아 있습니다.
소수서원 현판
죽계지
주세붕이 지은 ‘죽계지’에는 소수서원에서 지켜야 할 규칙인 ‘원규’가 실려 있습니다. 제사를 경건히 모실 것, 어진 이를 받들 것, 사당을 잘 보수할 것, 물자를 아껴 모을 것, 서책을 점검할 것 등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 원규는 그 뒤에 세운 다른 서원에도 두루 영향을 끼쳤습니다.
1871년(고종 8년) 서원 철폐로 많은 서원이 헐려 사라졌지만, 아직 우리 주위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특색을 내세우는 서원이 여기저기 많습니다. 급변하는 사회문화 속에서 우리 ‘서원’이 어떻게 적응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첫 서원인 ‘소수서원’이 이 시대 서원의 새 모습으로 앞장서길 기대합니다.
소수서원의 제향 음성 파일 (4:25)
소수서원의 문성공묘는 안향을 비롯한 안축・안보・주세붕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서 향례 절차를 적은 가장 오래된 ‘홀기’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초헌・아헌・종헌관이 술잔을 올릴 때마다, 안향이 성리학을 들여온 업적을 기리는 ‘도동곡’이라는 경기체가를 노래합니다. 이 ‘도동곡’은 주세붕이 손수 지은 노래로, 유학의 근본과 그 실천 방법, 공자와 주자의 도학, 그리고 안향이 이 땅에 도학을 들여온 것을 찬양합니다.
문성공묘
향사(독축)
제향 인물
안향
주세붕
이 고려 때 중국에서 들여온 성리학은 이 땅에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조선 건국이념의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1287~1348)과 (1302~1357)는 안향의 후손입니다 안축은 풍기에서 중앙에 오른 사대부입니다.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었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의 ‘관동와주’라는 문집도 남겼습니다. 안보는 고려후기 문신으로 효성이 남달랐습니다.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공직을 그만두려 하자,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일을 볼 수 있도록 나라에서 배려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첫 서원인 소수서원을 세운 은 지극한 효행과 청백리로서 신망이 높았습니다. 이렇듯 제향 인물을 공자가 아닌 지역의 선현으로 모시는 전통은 소수서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소수서원의 강학 음성 파일 (6:34)
명륜당
소수서원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었던 때 말고는 꾸준히 원생을 교육했습니다. 전해오는 입원 유생의 명단을 보면 영남의 각 고을은 물론 서울・충청・전라・강원・경기에서 찾아온 유생도 적지 않습니다. 해마다 30명쯤 뽑아서 1888년 마지막 원생을 받을 때까지 4000여 명의 선비를 배출시킨 인재 양성과 성리학 발전의 요람이었습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배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이황은 제자들에게 늘 ‘삿된 생각을 하지 마라’,‘스스로를 속이지 마라’,‘항상 공경하라’,‘홀로 있을 때도 삼가라’라고 강조했습니다.
소수서원의 교류와 유식 음성 파일 (7:32)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죽계의 맑은 물빛에 취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 ‘취한대’, 그리고 서원 앞 죽계 가까이 풍광이 수려한 곳에 시를 짓고 연회를 갖던 ‘경렴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라보는 죽계 건너 ‘백운동 경자바위’에 ‘敬(경)’자가 붉게 새겨져 있습니다, 유교의 근본 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 글자인 ‘경’은 ‘理(리)’와 함께 성리학의 핵심 화두로서 서원 창건이념을 품고 있습니다.
문화재 & 기념물 음성 파일 (8:15)
명륜당(소수서원 강학당, 보물 제1403호)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소수서원에는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을 비롯해 공자와 그 제자들을 그린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주세붕 초상’ 등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또한 ‘문성공묘’와 ‘명륜당’이 각각 보물로 정해져 있으며, 서원 진입로에 서 있는 은행나무인 학자수 두 그루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ㆍ관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