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서원문화

한국서원의 역사와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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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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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로 돌아갑니다. 우리 ‘서원’이 언제, 어디서부터 들어섰는지 살펴봅니다.

1543년(중종38)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곳 출신인 유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처음입니다. ‘백운동서원’은 1550년(명종5) 이황이 간청하여 임금이 ‘소수서원’이라 이름 짓고 현판을 하사 하여, 우리나라의 첫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사액서원에는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이 지원되었습니다.
그 뒤, 여기저기 잇달아 들어선 ‘서원’은 조선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에너지가 됩니다. 때마침 이 시기에 유교 이념의 ‘사림’이 나섭니다.

‘사림’은 저마다 학문과 행실을 익히고 닦았으며, 서원은 이런 인재를 보다 반듯하게 양성하고 배출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 ‘사림’의 정치・사회적 활동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서원은 본받을 만한 인물을 모시는 ‘사당’의 역할과 더불어, 지역사회의 교육・문화적 환경을 알차게 가꾸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1만 명 넘는 유생들이 뜻을 모아서 임금에게 상소(만인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지성인으로서의 의무감이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들어서자 서원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비난과 원성 속에 갖가지 잘못이 불거지고, 사림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서원은 쇠퇴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1871년 서원철폐령까지 내려지면서 서원은 고작 47곳만 남게 됩니다.

서원은 인물과 사상, 철학과 정신, 학문과 가치관 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나라를 위해 지조와 절개를 지켜가며 선비답게 명예롭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서원을 둘러싼 건축물과 주변의 경관, 사람과 정신, 문화적 질서 등에서 발휘되는 우리 서원의 전통가치는, 현대를 넘어 미래로 이어가며 발전시켜야 할 충분한 이유와 차별적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보다 다양한 콘텐츠로 속을 채운 ‘한국의 서원’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서원’은 이제 더 이상 ‘역사 속의 옛집’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물질적 가치로 어지러운 현대인의 삶 속에서 ‘서원’은 올바른 정신적 가치를 지켜주며 우리 미래를 보다 바르게 밝혀가는 ‘청정한 새 기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서원의 기능

퇴계 이황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라에 어질고 총명한 인재를 얻는 것은 서원에서”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을 세운 ‘이황’다운 주장이었습니다. 이렇듯 인재양성의 요람인 옛 ‘서원’에서는 학문을 닦고, 선현의 제사를 지내고, 자연 속에서 풍류를 누리며 인적 네트워크를 두루 다질 수 있었습니다.

제향

서원은 모시고 있는 선현의 뜻을 기리는 ‘제향’에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성균관, 향교나 중국, 일본의 전통유학 교육시설처럼 ‘공자’가 아닌 지역 선현만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국서원의 특징입니다.
서원에 모셔진 인물들은 한국 지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 따라서 서원의 위상은 겉으로 보이는 건축물의 규모보다 ‘사당에 어떤 분을 모셨는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에게는 제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곳곳마다 그를 모시는 서원도 늘어났습니다.
서원은 주로 앞이 훤하게 열린 비탈진 터에 세워졌습니다. 보통 앞쪽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이 들어섰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지어 선현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제사는 이곳 사당에서 지냈습니다.
제사는 선현의 그 정신을 이어가기로 다짐함과 동시에, 사림이 서로 결속을 굳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제사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지내는 ‘춘추향사’와 다달이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삭망례’, 정월 초닷새 즈음에 지내는 ‘정알례’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춘추향사’를 가장 중요하게 지냈습니다.
제사는 하루 전날부터 준비하는 절차가 있어서 모두 이틀 동안 진행됩니다. 대체로 제물마련과 제관을 정하는 집사분정, 축문쓰기 등을 첫날 준비합니다. 이튿날, 동이 트면 몸과 마음을 보다 정갈하게 가지고, 단정하게 갖춘 옷차림으로 사당에 모입니다. 제례의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 낭독에 따라 제관들이 예를 다합니다. 제사는 입재-성생례-집사분정-제물근봉-제물점시-사우입장-분향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철변두-음복례-향약낭독-파재 순으로 이어집니다.

강학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그리고 ‘성균관’으로 이루어진 ‘관학’ 중심이었습니다. 향교는 사족 자제들이 오로지 과거시험에 몰두하는 바람에 인성교육이 부실했습니다. 사부학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균관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집중양성해서 왕조체제 유지에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서원은 달랐습니다.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는 ‘과거시험’ 준비보다, 성리학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집중 교육했습니다. 원생들은 자연스레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 고된 수련을 거치며 학식과 덕행을 두루 갖춘 진정한 ‘선비’로 양성되었습니다.
서원교육은 성리학 교재와 서원에 모신 선현이 지은 책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때문에 서원마다 교육 내용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도산서원은 이황의 학문을 바탕으로 ‘심성’과 ‘우주론’이,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의례’가 중심이었습니다. 이렇듯 서원에 남아있는 ‘강학규약’, ‘강학내용’, ‘평가’, ‘강학의례’ 등을 통해서 서원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현재도 많은 서원에는 선현의 가르침을 담은 목판과 문집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책판과 서적들은 책이 귀했던 시대에 학문과 지식을 널리 펴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서원에서는 책을 파고드는 학습뿐만 아니라, 성리학 이론과 학설을 주제로 한 자유 토론도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한편 서원 건축물의 강학공간에는 ‘강학당’과 원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서재’가 있습니다. 서원의 중심에 있고 가장 큰 건물인 강학당은 수업이 있을 때 말고는 원생들이 함부로 오를 수 없습니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는 강의실이고 좌우 한 칸은 각각 원장실과 교무실입니다.

교류와 유식

붓과 책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의 맑은 기운 속에 둘러앉습니다.
쾌적한 바람이 흐르는 대청마루에 모여서 시를 짓고, 산수화를 그리다 보면 자연이 곧 스승임을 깨닫게 됩니다. ‘유식’하기 좋은 곳, 바로 ‘누정’입니다.

누정은 긴장된 서원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에 둘러싸여 정신을 맑히는 공간입니다. 말쑥하고 소박한 서원에서 가장 화려한 건축물이 누정입니다.
애써 겉치레는 않았지만 멋을 잔뜩 냈습니다. 기둥 하나 허투루 세우지 않았습니다.
속내도 있는 대로 다 드러냅니다. 문이나 벽이 없어 사방이 탁 트여 자연이 그대로 스며듭니다.
누정은 ‘밖’에서 ‘안’으로 들여다보는 공간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받아들이는 공간입니다. 훤한 대청마루 바깥으로 열린 자연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입니다.

누정에서 만나는 나무, 돌, 물, 산, 바람, 서리, 눈, 비는 사림에게 학문적 사고의 대상입니다. 어우러져 삶과 자연을 이야기하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립니다.

서원의 ‘유식’은 서원사람들 뿐만 아니라 서원에 찾아오는 바깥사람들도 함께했습니다.
명망 높은 성리학자나 관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교류했습니다.
덕분에 서원에 걸려있는 다양한 현판에는 이들의 올곧은 정신과 해박한 학문의 깊이가 반듯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듯 ‘유식’은, 인간과 자연의 ‘원만한 소통’과 ‘조화로운 공존’의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