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서원의 개요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은 1615년 지역의 유림들이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이자 관료인 최치원(857~?)을 기려 세웠습니다.
무성서원 전경
강수・설총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히는 최치원은 유교・불교・도교와 노장사상에도 밝았습니다. 그는 13세 때 당나라에 공부하러 건너간지 7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고, 879년 ‘황소의 난’때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지어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 뒤 29세 때 돌아와서 여러 고을의 태수를 지냈습니다. 최치원이 태산 태수로 있다가 떠나자, 지역민들이 그의 어진 인품과 선정을 잊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을 기리는 사당인 ‘생사당’을 세웠습니다. 이 ‘생사당’은 1483년에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이곳으로 옮겨져, 옛 지명을 따라 ‘태산사’라 불렀습니다.
그 뒤에 태인 지역 유림들이 현감 신잠을 기리는 ‘생사당’을 세웠습니다. 1615년 최치원의 ‘태산사’와 신잠의 ‘생사당’, 그리고 ‘향학당’을 합쳐서 ‘태산서원’이 되었습니다. 태산서원은 1696년에 숙종이 ‘무성서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 낸, 호남의 대표적 서원입니다. 무성서원의 ‘원규’에는 서원 교육의 목표와 내용, 방법 등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와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매우 엄격했습니다.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해야 했고, 의리를 지키며, 학문에도에 힘써야했습니다. ‘격몽요결’과 ‘소학’부터 시작해서 ‘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주역’,‘예기’, ‘춘추’를 배웠습니다.
무성서원은 야트막한 산 아래 마을 가운데, 단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을의 크고 작은 집들이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주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세운 서원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겉치레 보다 속을 다져온 공간으로 느껴집니다. 이웃과 함께하면서 지역문화를 바르게 이끄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연스레 서원의 건축물들도 마을을 향해 ‘열린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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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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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창의 기적비
정문인 외삼문 ‘현가루’는 문루이자 유식공간입니다. ‘현가루’를 지나니 강당인 ‘명륜당’입니다. 3칸의 마루로 앞뒤가 훤하게 트인 구조입니다. 이곳 강학공간은 다른 서원과 달리 기숙사인 ‘강수재’가 강당 앞마당을 벗어나 담장 밖에 있습니다. ‘명륜당’ 뒤로 올라 사당의 태극문양 내삼문을 들어서니 ‘태산사’가 꼿꼿하게 앉아 있습니다. 선현을 모시는 사당이지만, 이곳처럼 살아있는 선현을 모신 사당은 드뭅니다.
무성서원 밖 오른쪽 마당에 있는 ‘병오창의기적비’는 80여 명의 선비들이 항일 의병에 뜻을 모은 기록입니다.
학구적 선한 영향력은 물론, 낮은자세로 더불어 함께하고, 드러내지 않지만 때론 불타는 애국심으로 뜨겁게 일어선 무성서원의 깊은 내공에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무성서원의 제향
무성서원에서는 외삼문에서 사당까지 제물이 통과하는 길 양쪽으로 황토를 깝니다. 이 황토를 깐 안쪽으로 ‘신을 모시는 길’임을 나타냅니다. 신성한 제물에 사사로운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기와 제물은 두 사람이 시렁에 담아, 정문을 지나서 황톳길 따라 강당의 중앙 칸을 거쳐, 사당의 가운데 문으로 들어갑니다.
무성서원 향사는 위패만 모시는 다른 서원과 달리, 위패와 더불어 최치원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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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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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사 내부
제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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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무성서원의 제향인물은 , (1401~1481), (1479~?), (1491~1554), (1706~1772), (1500~1558), (1575~1635)입니다. 이들 모두 정읍지역에서 활동한 관료와 사림입니다. 이들은 향촌사회 교육에 성리학을 널리 펴고 적극 권장했습니다. 성리학의 사회교화와 실천을 이끌어 낸 뚜렷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는 다른 서원들이 지역사회 강학활동과 성리학 연구를 중심으로 제향인물을 선정한 것과 다릅니다.
무성서원의 강학
‘마음을 열고 눈을 밝혀 행실에 이롭게 하고자 독서와 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무성서원 ‘원규’에 적혀 있습니다. 또한 ‘공부는 덕을 쌓아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데 목적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스승과 벗을 따라 독서와 학문을 닦아야하는데,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엄하게 다뤘습니다. 앞서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 60대, 바둑이나 장기 등 잡기를 하면 70대, 여색을 탐하면 100대 등입니다.
어떤 깊은 학문보다 ‘덕을 성취하여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공부’를 강조한 무성서원의 강학에서 새삼 ‘교육’의 참뜻을 깨닫게 됩니다.
무성서원의 교류 및 유식
무성서원 ‘현가루’. ‘공자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거문고와 노래는 끊지 않았다’는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이라 합니다. 학문을 닦는 서원 건축물의 이름이 ‘현가루’이니‘아무리 어렵고 힘든 여건에서도 공부를 끊지 않아야 한다’라는 뜻일지 모릅니다.
유생들은 잠시 책을 덮고 허리를 펴며, 마을 가운데 우뚝 선 이 ‘현가루’에 오릅니다. 둘러 앉아 시를 주고받으며 노래를 합니다. 맑은 기운이 향기처럼 번져나면서 마을은 온통 ‘유식의 한마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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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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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가루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