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의 개요
‘… 온 집이 고요하고 벽엔 책이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고 잠자코 앉아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어 책을 편다, 가끔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기뻐서 밥 먹는 것도 잊었다 …’
이황(1501~1570)의 ‘도산잡영병기’에 적혀있는 글입니다.
이 나라 성리학의 큰 별인 이황은, 차분하게 탐구하며 책을 읽는‘정독’과 ‘숙독’이 가장 중요한 공부라 했습니다.
도산서원 전경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은 일찍이 이황이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과,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도산서원’으로 나누어집니다. 색칠이나 장식이 없는 단순하고 수수한 모습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그대로 두고, 그 뒤쪽에 ‘광명실’, ‘전교당’, ‘상덕사’ 등을 지어서 1574년에 ‘도산서원’을 세웠습니다. 이듬해 1575년, 선조로부터 현판을 내려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서원 중심부에 있는 ‘전교당’은 강당입니다. ‘전교당’ 처마에 걸린 ‘도산서원’ 사액 현판은 명필 한석봉이 썼습니다. ‘전교당’ 앞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박약재’와 ‘홍의재’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 위의 사당 ‘상덕사’에는 이황과 그의 제자인 조목을 모시고 있습니다.
비대칭으로 세운 제향공간과 강학공간, 누각형식으로 지은 ‘장판각’, 그리고 한쪽만 온돌방이 있는 비대칭 강당 ‘전교당’등은 서원건축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시사단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학문과 학파의 본보기를 이룬 서원입니다. 교육은 토론 중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학술・정치・사회적 영향력이 높았습니다. 성리학 관련 고서적, 목판을 많이 갈무리해 두었습니다. 서고인 동·서 광명실에 간직하고 있는 책은 모두 907종 4,338책이나 된다고 합니다. 서원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도서관이나 책을 엮어내는 출판사 구실도 했습니다.
게다가 도산서원은 지역공론을 ‘만인소’에 적어서 중앙에 알리기도 했고, 도산서원이 앞장선 공론은 나라에서도 받아들였습니다. 도산서원의 성리학적 대표성과 상징성이 널리 인정된 것입니다.
정조는 특별히 도산서원에서 이황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관료를 시켜서 향사 제물과 제문을 보내는 ‘치제’를 하고 ‘과거’도 열었습니다. 서원 앞 강 건너에 소나무가 둘러싼 ‘시사단’은, 1792년 정조가 이황의 학덕을 기려 과거시험 ‘도산별과’를 신설해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한 곳입니다. 응시자가 많이 몰려 도산서원에서 치르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가 강가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다고 합니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시사단’이 물에 잠기자, 그 축대를 물 위로 쌓아올렸습니다.
한편 2020년 10월 1일 도산서원 향사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서원 6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이 초헌관을 맡아 첫잔을 올렸습니다. 이배용 (재)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은 도산서원을 비롯한‘한국의 서원’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데 크게 공헌 했습니다.
도산서원의 제향
향례 3일 전부터 제사를 지내는 유사들이 동·서재에 들어와 예를 갖추는 도산서원의 제향은, 이황이 제정한 제향의례를 철저하게 지키며 이 나라 서원제향의 기준을 이룹니다.
이황은 소수서원의 의식순서를 고쳐 다듬어서, 서원 제향의례의 원칙을 마련했습니다.
도산서원은 향사 제물을 준비할 때, 서원입구의 ‘열정’이라는 우물에서 큰 소리로 횟수를 세면서 아홉 차례 쌀을 씻는 ‘석미례’를 치렀습니다. 지금은 옛 우물 근처의 수돗물로 씻습니다. 그리고 분향할 때 다른 서원과 달리 향로를 제상 위에 올려놓고 분향합니다.
도산서원 ‘향사’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지냅니다.
상덕사
제향 인물
은 안동출신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체계화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황의 성리학 연구 및 저술들은 조선 사림의 귀중한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뒤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유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황은 16세기 중후반 서원건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습니다. 그는 서원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한 시대를 책임지는 사림을 양성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원에서 배출된 사림은 도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선비’라는 조선의 엘리트였습니다. 이처럼 이 나라 성리학의 정착과 서원 보급에 있어 이황은 참으로 상징적 인물입니다.
제향공간 ‘상덕사’에는 이황의 제자 (1524~1606)도 함께 모셔졌습니다. 열다섯 살에 이황의 제자가 된 조목은 봉화현감,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학문이 깊은 대학자였습니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스승을 본받아 서당에서 원생들을 가르치며, 스승의 문집을 펴내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도산서원의 강학
도산서원 강학은 토론중심이었습니다. 큰 규모의 심포지움이나 세미나 같은 공부모임인 ‘강회’입니다. 성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논쟁들이 활발했고, 이를 기반으로 학파의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습니다.
‘강회록’은 이런 과정을 섬세하게 적어놓은 자료로서, 성리학 학술의 전당인 도산서원의 강학기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도산서원의 교류 및 유식
도산서원에서는 사림문학의 활발한 교류와 창작이 이뤄졌습니다. 서원을 찾은 사림은 문학성이 뛰어난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주변 자연을 주제로 3000여 작품이 남아있습니다. 이 가운데 이황이 지은 ‘도산잡영’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산수가 빼어나 조선의 화가들도 잇달아 찾아들었습니다.
천연대
천광운영대
문화재 & 기념물
도산서원도(보물 제522호)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상덕사 및 삼문(보물 제211호)
전교당(보물 제210호)
강당인 ‘전교당’이 보물 제210호, ‘상덕사’ 및 ‘삼문’이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보물 제522호 ‘도산서원도’는 조선후기 문인화가 강세황이 그렸습니다.
도산서당(보물 제2105호)
농운정사(보물 제2106호)
보물 제2105호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 건립 된 이후 철저한 보존관리 방침과 보수 절차에 의하여 관리되어 건립 후 약 460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보물 제2106호 농운정사는 조선의 학문세계나 정치활동에서 큰 활동을 한 영남 선비들이 젊은 시절 퇴계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공부하던 산실이며, 그 원형이 잘 남아있는 유적이다. 건축형태에서 농운정사는 도토마리 집의 원형을 살려 지은 교육시설의 뛰어난 사례로 꼽히며, 그 평면은 가운데 몸채를 두고 전면과 후면 양 끝에 마루방과 헛간을 갖춘 ‘工’자 형태를 이룬다. 농운정사의 도토마리 양식은 도산서당 건립을 맡았던 승려장인 법연의 구상에 근거한 것이며, 그의 제자 정일에 의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