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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리아-[임순만 칼럼] 지혜의 공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관리자
2023.12.08 16:50
조회 247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가을의 노랑색이 절정을 이룬 10월 문화의 날에 우리나라 양반문화와 성리학을 찬란하게 꽃피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찾아갔다. 소수서원(경북 영주),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과 함께 9곳이 유네스크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으로 등재됐다. 세계의 변화가 극심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게 할 정신의 배움터가 필요할 것이다.
안동시 도산면 낙동강변에 자리잡은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서당을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곳이다.
서당은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것으로 선생이 직접 설계한 곳이고, 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지 6년 뒤에 제자들에 의해 완공된 곳이다. 이곳은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 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서원은 무지하고 불민한 사회의 목탁이었다. 서원제도가 성립되는 시기는 16세기 중반이다.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주세붕이 풍기에 건립한 백운동서원이다. 서원은 사묘(私廟)의 형태로 시작되었으나 곧바로 지방 유생들의 강학소가 되었고, 전국의 서원에서 공부한 사림들이 조선을 이끌어간 지방 인맥을 형성했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인격과 사상적 산실이다.
퇴계는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시작으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되, 자신이 맡을 벼슬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무리 좋은 벼슬이라도 사양하고 70여 회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정신의 청결함이 오백년을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청정하다. 서원의 중심건물인 전교당(典敎堂) 마루에 앉아 퇴계와 율곡의 우정을 떠올려본다.
도산서원을 세우기 전의 일이다. 35살 연하의 율곡이 계상서당(천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그림)으로 찾아와 사흘을 묵고 갔다. 하룻밤만 자고 가려고 했지만, 퇴계가 더 지내고 가라고 놓지 않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이틀을 더 머물렀다. 이후 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두 사람의 수양과 서로를 향한 정성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스물셋의 율곡은 퇴계를 극진히 공경했고, 퇴계는 어린 율곡의 총명함을 사랑하여 젊은이에게서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건만 훗날 두 사람의 제자들이 동인과 서인이 갈라져 싸운 역사는 여전히 부끄럽고 당혹스럽다.
빨강 매화꽃을 도산서당의 상징으로 쓰고 있었다. 조선 선비들은 창밖에 빨강 매화는 심지 않았다고 한다. 빨강 꽃은 고혹적이라서 기피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녹매(綠梅)를 즐겼다고 한다. 서원 앞 강가에 있는 비각 시사단(試士壇)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1792년 정조가 퇴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에서 특별시험인 도산별과를 보게 했고, 그 시험 장소를 기념해 세운 비각이다. 당시 응시자가 7,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하회마을을 방문한 후 병산서원으로 갔다. 병산서원은 애초에는 조선 선조 때인 1575년 서애 류성용이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현재 위치인 안동 풍산면으로 옮겨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고 한다. 1607년 서애가 돌아가신 이후 제자들이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으로 모시면서 서원이 되었다.
바깥담에 세운 복례문을 지나 만대루(晩對樓) 아래를 통과하면 좌우로 동·서재가 있고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입교당 마루에 좌정하여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와 만대루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병산을 바라보면 건물과 자연의 조화에 눈이 번쩍 뜨인다. 인공과 자연이 이렇게 잘 녹아드는 것은 건물의 자연스런 배치만이 아니라 이 누마루에 성리학의 열정을 토로하던 유생들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의 이상을 느껴본다. 만대루라는 누각의 이름은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산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병산 위로 떠오른 달이 만대루 앞 작은 연못에 비치고 서원 안마당에 달빛이 가득 내리면 병산서원은 비어있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될 것이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백미였다. 해질무렵(晩)은 화평의 시간, 영국에 유명한 ‘Afternoon Tea’(오후의 홍차)가 있고, 일본에도 ‘後の紅茶’(오후의 홍차)가 있는데, 화평의 시간에 홍자를 마시는 지구촌 사람들의 심정이 가깝게 다가온다.
입교당 앞 동쪽에는 ‘동직재(動直齋)’, 서쪽에는 ‘정허재(靜虛齋)’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동재는 고학년, 서재는 신참 유생이 사용한 기숙사다. 언뜻 보기에는 양쪽 입면이 비슷해 보이나 문살의 칸수도 다르고, 드나드는 문도 다르게 엄격한 비대칭 구조를 하고 있다. 선후배의 구별이 분명한 조선 성리학의 깐깐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뒤편에는 존덕사와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이 있다. 동쪽 문을 지나면 제사 음식을 보관하는 전사청이 있고, 바깥 뜰에는 하늘이 보이는 달팽이형 뒷간이 있다. 병산서원은 서원 건축의 백미라고 한다.
갈등은 사람들의 심성에 상처를 입힌다.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적대감이 아니라 협동정신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협동과 평화는 엄격한 속박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법의 지배를 받는 한도 안에서만 평화가 보장된다. 그 너머는 폭력을 향해 열려있다. 갈등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는 사상의 제의(祭儀)가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조선의 서원이다. 제의는 갈등을 해소시키는 격식이다. 한국의 서원을 바라본다. 이 갈등의 시대를 풀어갈 지혜가 솟아오르는 공간이 아름답다.
임순만 작가·전 언론인 (국민일보 전 편집인)
출처 : 이코리아(https://www.ekore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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