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격 : 우수상
접수번호 : CIP08310619
성명 : 최O숙
제목 : 마음을 비우고 채워가는 곳
작년 7월 무렵, 초등학교 교감으로 퇴직한 친구에게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자신의 고향인 경주 옥산서원이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정읍 무성서원 등 나머지 8곳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며 함께 다녀오자는 권유였다. 평소 나 역시 사찰이나 서원 같은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친구와 동행하기로 했다.
친구는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옥산서원과의 인연을 풀어놓았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옥산서원에 갔던 기억과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서원을 찾아가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방향성을 잡았다는 얘기였다. 일찍이 옥산서원에서 학문의 즐거움을 배웠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옥산서원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해 옥산서원에 들어서자 친구가 조곤조곤 역사에 대해 설명해준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72년에 설립되었는데,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옥산서원은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을 띈 당대 서원에 비해 질서정연한 형식을 보이고 건축물에서도 절제가 묻어났다. 옥산서원이 지닌 그 고요함에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옥산서원은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면에 위치해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쪽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은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으로, 출세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성숙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먼 곳에서도 사람이 찾아온다는 숨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역락문을 지나면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누각인 무변루가 나오고, 그 너머로 강당인 구인당이 보인다. 친구는 내게 누마루 건축물을 서원에 최초로 도입한 곳이 바로 옥산서원이라고 알려주었다. 옥산서원 이후부터 서원에 누마루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무변루 2층 누마루에 오르니 서원 내부는 물론이고, 멀리 계곡과 산등성이까지 그림처럼 한눈에 펼쳐진다. 친구는 대학입시나 결혼, 출산 등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이곳에 올라 혼탁해진 마음을 깨끗이 비우곤 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누마루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고즈넉한 게 제법 운치가 있어보였다. 여기에 구인당 대청에서는 자옥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와 모든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기에 좋았다.
강학, 제향, 교류 등 서원의 다양한 역할 중에서 옥산서원은 출판과 장서의 중심기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옥산서원에는 제향자의 문집과 성리학 서적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연관된 다양한 서적들이 소장돼 있다. 또한 서원의 교육 방식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원 관련 고문서들도 함께 보관돼 있다. 그중에는 지난해 2월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1573년 경주부에서 찍은 '삼국사기' 완질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친구와 함께 옥산서원을 거니는 내내 은은한 묵향이 풍겨오는 것 같았다.
친구는 내게 옥산서원에 오면 편액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당대 대가들의 글씨를 썼기 때문인데, 구인당 처마의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대청에 걸린 편액은 문신이자 명필 이산해가, 구인당과 무변루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현판을 직접 쓴 것으로 보아, 과거 옥산서원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유추해볼 수 있었다.
옥산서원을 다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잠든 친구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서원이 자칫 공허해지기 쉬운 현대인의 정신적 가치를 다잡아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서원을 찾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이렇듯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니 말이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앞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원을 찾아 마음에 안정을 찾고 물질보다 소중한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